가끔 질문을 받는다. 보면 힘들어지는데 왜 보냐고, 사는 것도 팍팍한데 보고 나면 가슴이 아프고 답답해지는 영화를 왜 보냐고.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을 법한 일들을 두 시간 이내로 농축해 보여주다 보니, 깊게 찌르고 들어오는 영화들이 나라고 편할까. 그럼에도 들여다봐야 할 영화가 있는데, 켄 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리키는 허울 좋은 자영업자다. 건설회사에서 실직한 후, 대출금을 갚기 위해 노동 현장을 전전하며 성실하게 일했지만 딱히 사정이 나아지지 않았다. 실직 급여를 받는 것조차 창피하게 생각할 정도로 성실한 가장 리키의 꿈은 소박하다. 월세에서 벗어나 가족들과 편안하게 살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싶을 뿐이다. 그 꿈을 좀 더 앞당기려고 아내 애비의 차를 팔아 택배용 밴 계약금을 내고 택배기사 일을 한다. 온갖 불합리한 조건들에 대한 설명은 대충하고 ‘자영업자’라는 타이틀만 부각한 환상적인 제안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6개월만 버티면 빚고 갚고 내 집 마련도 할 것이라는 리키의 희망은 택배기사로 일한 첫날부터 벽에 부딪친다. 교통체증, 고객들의 불친절, 주차 공간 부족, 오배송지 입력 등으로 고생하는 것은 약과다. 물건을 밴에 싣는 때부터 분실의 책임을 져야 하고, 대리기사를 쓰려면 고용비를 부담해야 한다. 갑작스런 사정이 생기면 대리기사 고용비와 함께 벌금까지 문다. 강도에게 폭행을 당해도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빼앗긴 여권 비용과 망가진 PDA(개인정보단말기) 값, 대리기사 고용비, 벌금까지 다 토해내야 한다.

위험 부담 없이 배를 불리는 택배회사에서 리키는 PDA와 같은 소모품이다. 불합리한 시스템에서 버려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 보지만 역부족이다. 하루 열네 시간 동안 먹을 권리와 생리현상까지 포기하고 배송 수수료를 벌어보지만 뭉텅뭉텅 빼앗긴다. 쉴 권리조차 없는 리키에게 자영업자라는 타이틀은 ‘기본급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명분하에서만 유효하다. 애비가 꾼 꿈 한가운데 리키가 있다. “젖은 모래 속에 빠졌는데, 애들이 우리를 꺼내려고 해. 근데 애를 쓰고 발버둥칠수록 커다란 구덩이로 점점 더 빨려 들어가.”

요양 보호사 일을 하는 애비의 사정도 리키와 별반 다르지 않다. 건당 보수를 받는 계약 노동자이기 때문에, 아홉 집을 이동하는 시간, 갑작스럽게 목욕시키느라 추가로 쓰이는 시간 등을 전혀 보장받지 못한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아홉 시까지 일하느라 제대로 먹고 쉴 시간조차 없다. 어머니를 돌보듯 진심으로 대하지만 대가는 초라하다. “사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는 리키의 하소연은 애비에게도 해당된다.

시스템의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이된다. 부모에게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철이 너무 빨리 들거나 엇나간다. 아들 세브는 힘들게 사는 부모와 대학을 나와도 실업자로 집돌이로 있는 옆집 형을 보고 방황한다. 미래가 보이지 않아 답답한 세브는 자기들을 위해 애쓰는 부모가 눈에 보이지만 외면하고 싶어 한다. 반면 딸 라이자는 스스로 자란다. 엄마의 음성 사서함 메시지를 듣고 스케줄을 소화하고, 혼자 잠든다. 엄마 대신 학교 안 가는 오빠를 깨워 보내기도 하고, 피곤한 부모를 대신해 집안일도 한다.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지만, 감독이 아주 작은 빛줄기 하나 남겨 놨다고 생각하련다. 그러지 않으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록 꼼짝 못하는 막막함을 달랠 방법이 없다. 퉁퉁 부은 눈으로 밴을 몰고 일하러 가던 리키를 응원한다. 리키의 가족은 큰 걸 바라는 게 아니다. 다 같이 모여 식사하며 웃을 수 있는 가족, 넷이 앉기엔 비좁은 밴에서도 흥겨운 음악에 춤을 추며 즐거워하는 가족이다.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님을 눈치 채는 부모, 방황하다가 진짜 위기 앞에서 집으로 돌아온 세브, 한없이 사랑스러운 라이자가 함께라면 한 발짝 정도는 앞으로 나가지 않을까.

영화의 존재 이유는 분명하다. 영화가 아니었으면 속속들이 들여다보지 못했을 세상을 본다. 수주에 저당 잡혀 소사장으로 독립해 나온 대가로 장비 들인 빚에 허덕이고 있는 오빠를 이해하고, 눈여겨보지 않았던 택배기사들의 처우가 궁금해진다. 적어도 골목길에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는 택배차를 불편하게 바라보지는 않게 되었다. 아주 작은 공감의 영역에 영화가 있더라도 볼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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