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입학한 딸이 첫 시험을 끝내고 전화를 했다. 엄마라고 부르는 순간 ‘망쳤구나.’라는 느낌이 왔다. 이미 물기를 먹은 목소리, 스스로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하던 아이였는데 얼마나 긴장을 했을까 싶어 서둘러 위로의 말을 꺼냈다.

그만 울어. 앞으로 수십 번의 시험을 보게 될 텐데 늘 네 마음처럼 볼 수는 없을 거야. 단순히 결과를 보지 말고 너가 준비했던 과정을 보자. 긴장해서 시험은 망쳤지만 그동안 공부한 게 어디 가는 건 아니잖니. 운다고 다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딸을 위로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데 《당신이 옳다》(정혜신 글, 해냄)를 읽어보니 나는 그냥 삶의 정답지를 건넸을 뿐이었다. 누구에게나 들을 수 있는 상투적인 말. 이런 말을 듣자고 딸이 전화를 한 건 아니었을 거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공감이란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지만 계몽은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언어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몽과 훈계의 본질은 폭력이다. 마음의 영역에선 그렇다.

내가 딸에게 건넨 말처럼 우리 일상의 언어 대부분은 충조평판이다. 누군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할 때는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왜 이런 실수를 반복할까. 단순히 충조평판이 도움이 될 거라 믿어서라기보다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일 때가 더 많다는 저자의 글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는 말한다. 벼랑 끝에 선 사람에게 필요한 건 내 말이 아니라 그의 말이라고. 그의 존재, 그의 고통에 눈을 포개고 그의 말이 나올 수 있도록 물어줘야 한다고. 무언가 해줘야 한다는 조바심을 내려놓고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떤지 이렇게 물어봐야 한다. “지금 네 마음이 어떤 거니?”, “네 고통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 거니?”

아무리 바쁜 와중에 받은 전화라고 해도 그냥 딸의 말을 들어줘야 했다. 그 긴 정답을 쏟아낼 시간에 딸의 얼굴을 적시고 있을 눈물을 그려봐야 했다. 얼마나 속상하냐고 물어보는 게 먼저였다.

그런데 이 무심한 엄마는 그 이후 딸이 시험을 보곤 울지 않은 이유가 내 말이 도움이 돼서 그런 줄 알았다. 어쩌면 자기 방에서 혼자 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부끄럽고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

다행히 공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라는 말에 희망을 얹는다. 단순히 누가 이야기할 때 중간에 끊지 않고 토달지 않고 한결같이 끄덕이며 긍정해 주는 것은 그냥 감정 노동이란다.

진정한 공감은 다정한 시선으로 사람 마음을 구석구석, 찬찬히, 환하게 볼 수 있을 때 닿을 수 있는 그런 상태를 의미한다. 사람의 내면을 한 조각, 한 조각 보다가 점차로 그 마음의 전체 모습이 보이면서 도달하는 깊은 이해의 단계인 것이다.

뒤늦게 깨달음을 얻어 공부를 시작한 엄마가 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으랴. 엄마 노릇이 처음이라 그렇다는 변명도 너무 궁색하다. 필요할 때 그 마음을 안아주지 못해서 그저 미안할 뿐.

공감은 타고나는 성품이 아니라 내 걸음으로 한발 한발 내딛으며 얻게 되는 무엇이라는 말이 참 좋다. 이미 몇 걸음 내딛은 것 같은 이 마음으로 다가서겠다. 사랑하는 이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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