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본 영화의 공식을 과감히 깬 영화가 있다. 유쾌하고 가볍게 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하나 곱씹어보게 된다고 할까. 킥킥대다보니 영화는 끝나 있는데, 어느 새 양손 가득 떡을 들고 있다. 한마디로 영화 ‘로스트 인 파리’는 매력적이고 독특하고 신선하다.

영화는 25년을 함께 해 온 부부의 합작품이다. 공동으로 감독과 주연배우를 맡은 피오나 고든과 도미니크 아벨은 선명하고 예쁜 화면 속에 유쾌한 웃음 코드를 장착해 아무렇지 않게 삶의 무거운 진리들을 툭툭 뱉어낸다. 죽음조차도 이 영화에선 한 편의 슬랩스틱 코미디가 된다.

캐나다의 눈 쌓인 예쁜 마을에 살았던 마르타와 피오나는 둘 다 파리에서 살고 싶어 했다. 48년의 시차를 두고 둘은 파리에 발을 디딘다. 먼저 파리로 떠나 자리잡은 이모 마르타가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여든여덟 살의 마르타가 단지 늙고 혼자 산다는 이유로 요양보호사는 그녀를 양로원에 보내려고 한다. 이에 마르타는 피오나를 불러 혼자 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마르타가 보호사의 눈을 피해 집을 나간 사이 파리에 도착한 피오나는 이모를 찾아 거리를 헤맨다. 두 사람이 만나기까지 수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파리 입성기 같기도, 인생 지침서 같기도 한 영화는 순수하고 단순해서 금맥을 다 노출한 듯하다. 꾀죄죄하고 잘나지 않아 보이는 주인공들이 소란스럽게 화면을 누비고 다니는 모습은 낯설기까지 하다. 수많은 영화들이 세련되게 포장하기를 좋아하는 것에 비하면 거의 민낯의 영화로 봐도 무방하다.

피오나 고든은 “인생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원하는 대로 우리가 흘러간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실제로 파리로 간 피오나는 뜻하지 일에 자꾸 휘말리며 마르타를 쉽게 만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피오나가 마르타를 찾는 데 도움을 주는 마르탱과의 뜻밖의 만남도 생긴다. 마르탱이 자꾸 잃어버리는 양말 한짝과 같은 사소하거나, 비교적 젊은 댄서의 죽음처럼 무거운 일들이 무질서하게 교차하며 인생이란 거대한 흐름에서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은 맞다. 마르타의 초간단 장례식을 치루는 시간에도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것과 같은 우연은 생각보다 우리 삶 속에서도 많이 일어난다.

그럼에도 동전의 양면처럼 바람은 인생을 끌어가는 신비한 힘이기도 하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피오나는 오래도록 바라던 파리로 갔다. 글을 잡고 낑낑대는 나도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부터 그 꿈을 발아시켜 냉동 보관해 뒀던 것 같다. 그냥 있는 건 없다. 뒤돌아보면 지금 현재를 설명하는 수많은 바람들이 지난 시간 속에 씨앗으로 있다. 마르타의 죽음으로 더 이상 머물 이유 없는 피오나는 돔에게 프랑스어 배울 핑계로 파리에 주저앉는다. 사랑과 오래 된 바람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인생 변수가 생긴 덕분이다.

 자유의지는 인생을 끌어가는 또 하나의 축이다. 마르타는 요양원에 강제로 수용되지 않으려고 노숙도 기꺼이 선택한다. 집을 두고 거리를 전전하며 살면서도 양로원에 갇혀 살기보다는 ‘자유’를 외친다. 만약 사회적인 보호를 받았다면, 한번 에펠탑에 오르고 싶었다는 평생의 바람을 이루지 못했겠지.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도전적인 생활을 선택해 자유를 얻은 마르타의 환한 미소는 여명 속에서 서서히 밝아오는 파리 시내보다도 아름답다. 우연과 자유의지는 맞물려 있는 톱니바퀴처럼 우리 인생을 끌고 간다.

감독의 시선은 한없이 아래로 향해 있다. 아름다운 파리는 세련된 멋쟁이들만의 도시가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고 늙은, 또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것이기도 하다는 말을 노골적으로 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지저분하고 실수투성이고, 늙고, 가난하고 힘이 없다. 깔끔한 파리의 모습과는 상충되지만, 그 어느 누구 하나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다.

깨알 같은 재미가 쏟아진다. 블랙코미디도 슬쩍 스친다.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분명히 갈릴 것 같다. 뼈있는 밝은 코미디 영화 한 편, 연극적인 과장된 몸짓으로  새롭게 온 ‘로스트 인 파리’에 대해 나는 감히 말한다, 찰리 채플린의 재림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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