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들이닥친다고 했던가. 영화의 주인공인 고등학교 철학교사 나탈리는 늘 걷거나 뛰면서 문제를 해결한다. 남편의 폭탄급 선언도 그녀를 멈춰 세울 수 없다. 결혼 생활 25년 만에 새로운 애인이 생겼다는 남편의 고백이 있어도, 그녀에게 너무 많은 일들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편하게 앉아 우아 떨 시간이 없다. 툭툭 터질 듯한 일상을 묘하게 봉합해 가며 단지 앞을 향해 걸어간다.

변화가 필요하다면 최소한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나탈리의 자세는 그랬다. 집착에 가깝게 자기를 의지하던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 참고서 집필자에서의 해고, 이론과 실천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애제자 파비앵의 반격 등등 일상이 급격히 변조될 징후가 보였지만 그녀의 태도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뻔한 투정을 하는 대신 그녀는 최대한 자기 식대로 치유해 나간다. 평생 사랑할 줄 알았던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떠나보내며 지적으로 충만한 삶이기에 홀로여도 괜찮다고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왜 바람을 폈느냐를 묻는 게 아니라, 왜 알게 했느냐는 질문을 하는 그녀는 직시와 함께 흔들려야 하는 일상이 싫었던 것으로 보인다. 파비앵의 조소에도 자식이나 새로 태어난 손주에게 마음을 활짝 열고 산다. 지나간 일들은 별일 아니고 새로 다가오는 일이 최고인 것처럼,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나탈리의 방식은 일반적이지 않지만 감독은 있는 그대로 지켜보라고 말한다. 일상에서 얼마든지 다가오는 일들이지만 화를 내거나 따지지 않고 일어난 일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홀로 이겨내라고 한다.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이해하며 자기를 잃지 말라고 한다. 영화 속 나탈리도 뒤치다꺼리에 투덜거렸지만 죽음 이후, 엄마가 왜 그토록 자기를 찾았는지, 공부를 못한 엄마가 자신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를 떠올리면서 이해의 눈물을 흘린다.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은 이미 프롤로그에서 다 했는지 모른다. 영화는, 마치 대명제를 서두에서 꺼내 주고 본문에선 이를 세세히 증명해 내는 연역법적 도출 과정 같다. 나탈리가 학생들에게 낸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시험 문제는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던진 감독의 질문과 같다.

영화는 일상이라는 씨줄과 철학이라는 날줄을 교묘히 연결해 한껏 풍부해진다. 헝클어질 뻔 했던 나탈리의 일상을 파스칼의 ‘팡세’가 일으켜 세우고, 다시 학생들 앞에 선 나탈리의 담담한 마음을 알랭의 ‘행복론’이 위로한다. 평온을 유지한 얼굴 밑에 숨긴 복잡한 내면을 사유의 힘으로 다스리는 모습은 허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낯설다. 별일 아니라고 툭 던지는 말에 엄청난 주제를 숨기기도 하고, 사이사이 교묘한 비꼼도 넣고, 은유도 있어 세세하게 들여다봐야 많이 보인다. 흩어진 구슬을 꿰면 꿸수록 작품의 의미는 풍부해진다. 흔한 일상을 이렇게 고급지게 포장해내는 영화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영화는 또 말한다. 다가와서 사라지는 진실들이 있는 반면, 사라지면서 다시 다가오는 일들도 있다는 것을. 남편을 놓으니 온전한 자유가 왔고, 삶을 놓으니 편한 죽음이 왔다고. 영화를 자세히 보고, 또 읽고 나서야 비로소 선명해진다. 살면서 내게도 수많은 일이 다가오고, 지나가고 또 다가오겠지만 각각의 상황에서 어떻게 존엄하게 자기를 지켜내야 하는지를 알겠다. 영화에서 한 수 배운다.

마법과도 같은 이자벨 위페르의 완벽한 연기와 감정선을 길게 끌고 가지 않은 감독의 연출력, 스토리를 꽉 채우던 음악 덕분에 오래도록 영화 ‘다가오는 것들’을 놓지 못할 것 같다. 마지막 장면에서 손주에게 불러주는 나탈리의 자장가가 그녀 마음인가 싶어 잔향의 안타까움에 계속 붙들리며 말이다. “오래 전 사랑했던 당신을 나는 잊지 않으리 ...... 나는 연인을 잃었다네 그럴 일도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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