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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것들에게 여전히 인사를 건네는
반월신문 | 승인 2020.01.22 11:32

엄마를 닮아 주당이라는 딸과 소주잔을 기울였다. 하고많은 유전자 중에 하필이면 주당이라니. 그래도 길바닥에 눕지는 않는다는 공통점까지 나누며 잔을 부딪치다 보니 어느새 커서 술친구로 마주 앉은 딸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딸 너머로 보이는《엄마. 나야.》 단원고 아이들의 시선으로 쓰인 육성 생일시 모음이다. 그리운 목소리로 아이들이 말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시인들이 받아 적었다는 책. 딸도 같은 학년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남다르게 이 책이 왔다.

왜 시인들이 아이들의 마음을 받아 적게 됐을까.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의 마음을 만져주던 치유공간 ‘이웃’의 관계자들은 “아이에게 잘 있다는 말 한마디만 들을 수 있으면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는 부모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래서 시인들에게 아이들의 생일에 맞춰 낭송되기를 바란다는 ‘생일시’ 청탁이 들어갔고, 의뢰를 받은 시인들은 아이들의 목소리가 찾아들기를 몇 날 며칠을 기다렸다. 누군가에게는 불쑥 찾아왔고, 누군가에게는 쉬이 찾아들지 않아 몸살을 앓아야 했고. 그래도 결국 아이들이 목소리를 낸 덕분에 우리는 그 말을 들을 수 있다.

모두 34명의 사랑스러운 아이들. 먼저 수인이가 말을 건넨다. 키 186센티미터, 신발 310밀리미터의 상남자 곽수인. 썰렁한 개그에 까르르 넘어가는 친구들이 있어서 즐거우니 눈이 내리면 박효신의〈눈의 꽃〉을 흥얼거리며 하늘을 보란다.

수정이는 살이 쪘다고 푸념이다. 뜨거운 밥에 참기름이랑 고추장 넣고 비벼 먹는 거 좋아해서 너무 많이 먹었더니 돼지가 된 거 같다나. 아빠가 십자수로 그린 자기 얼굴이 진짜 자기 얼굴보다 예뻐서 민망하다고.

막연히 시인들이 아프고 미안한 마음을 자기 나름대로 썼겠거니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은 담담히 넘길 수 있기를 바랐다. 이렇게 저마다 다른, 자기들의 이야기를 풀어낼 줄 몰랐다. 당황한 마음으로 딸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그 날 이후로 모든 아이는 내 아이니까.

누군가를 잃는다는 상실감은 어느 특별한 날이나 특별한 경우에만 느껴지는 건 아닐 거다. 어쩌면 이불을 들추며 늦었으니 어서 일어나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게 되거나 늘 시키던 치킨 두 마리를 반으로 줄여 주문할 때 오는 건지도 모른다.

나란히 나이를 먹어서 이제는 나보다 술을 더 잘 마시는 딸을 보고 있으려니 해가 갈수록 누나와 나이 차가 더 벌어지는 게 두렵다는 건계의 고백에 숨을 쉬지 못하겠다. 아무리 혜선이가 여전히 편식을 하고 여전히 수다를 떨면서 여전한 것들에게 여전히 인사를 건네면서 잘 지내고 있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아프다. 여전히 부끄럽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원망하지 않는다. 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고, 진짜로 그런 거라고 자꾸 웃는다. 자꾸 사랑을 말한다. 그래서 책을 덮으면 다른 낱말은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 나가고 더 이상 아이들을 잃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반짝이는 사랑만 남는다.

마치 곁에 있는 듯 느끼며 살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내 마음이니 자주 이름을 불러 줄 생각이다. 이 세상 모든 아이들에겐 부모 보다 오래 사는 삶을 주고 싶다. 그것도 역시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이려니. 매일 통증을 느끼는 그 마음에 봄날의 벚꽃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 뺄셈만 배워서 고통과 두려움, 안타까움을 빼니 추억들만 남았다는 아이들의 고백이 활짝 피어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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