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영화는 너무 단순했는지도 모른다. 죽음과 연결되어 있는 일상을 행복으로 바꾸는 건 우리 몫이고, 일상에서 자잘한 행복을 건져 올리며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거라는 뻔한 말을 했다. 그런데도 영화는 극장 문을 나서는 15년 전 그 날부터 지금까지 내게 가끔 묻는다.

“넌 어떤 기억을 영원으로 가져갈래?”

‘원더풀 라이프’, 죽음을 다루고 있지만 참 따뜻하고 편안한 전개 덕분에 감독에게 조용히 설득당하는 영화다. 죽은 사람은 영원으로 가기 전에 1주일 동안 ‘림보’라는 가상공간에 머문다. 그 사이에,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선택하면 영화를 만들어 상영해 주는데, 그 기억을 안고 영원의 세계로 넘어간다.

수많은 기억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니…! 어려운 일일까, 쉬운 일일까. 림보에 도착한 사람들이 생애를 되감기해 찾아놓은 대답은 뜻밖에 아주 사소한 순간들이었다. 뚜렷하고도 특별한 변곡점에서 행복한 순간을 찾아낸 게 아니라, 그냥 하루하루 흐르는 일상 속에서 건져낸 것이다. 소녀는, 엄마가 무릎에 뉘이고 귀지를 파주던 다섯 살 때의 기억을 선택한다. 노신사는 기관사 옆자리에 앉아 통학하면서 여름날 차창으로 불어오던 시원한 바람을 맞는 순간을 고른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8월의 크리스마스」 속 정원의 말처럼 생애 가장 소중한 기억 하나를 안고 영원으로 떠나는 인물들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나에게 그 순간은 언제일까? 영화가 상영되던 그때나 지금이나 내 선택에는 변함이 없다. 그 하루는 낮잠 자기에 딱 맞는 촉감으로 불어오는 바람만큼이나 나를 달콤하게 취하게 한다. 1989년 가을, 감정 표현에 한없이 서툴러 사랑하면서도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를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하게 종로서적 앞에서 운명적으로 재회했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북한산을 갔는데, 갑작스레 내린 눈 때문에 산행이 좀 어려웠다. 인수봉이 가까워질수록 눈발이 굵어지자 불안했던지 그가 아이젠을 사 내 신발에 묶어 주었다. 엎드린 그를 내려다보며 그 시간이 끝이 아니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바랐었는지. 불확실한 관계에서도 설레고 떨리고 간절했던 순간이다. 그 기억이 있어 녹슨 아이젠은 이사할 때마다 창고 맨 위 자리에 놓인다.

살면서 설레고 잊지 못할 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 기억 필터에 걸러져 수면 아래 잠겨 있다 툭 건드려지기만 하면 튀어 오르는 하루, 오래 전 일을 너무도 생생한 오늘의 일로 그대로 재현해 내는 하루, 필름이 다 늘어지도록 돌려봐도 언제든 다시 탄탄하게 되감을 수 있는 하루 말이다. 야자 시간에 몰래 빠져나와 걷다 달빛에 빛나는 도라지꽃에 취했던 밤이나, 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하던 순간도, 뱃속 아이를 벅찬 기쁨으로 만난 순간도, 오랜 투병 생활을 끝내고 의사의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순간도, 감동적인 예술품 앞에서 미동 없이 들여다볼 때도, 어느 날 문득 떠난 낯선 여행길에서 만난 뜻밖의 인연도 모두 삶의 순간순간 찾아오던 크고 작은 행복이었다. 삶은 직물과는 달라, 어느 한 곳이 풀려도 아름다운 기억 하나로도 다시 짜여질 수 있겠다 싶다.

쉽게 답을 찾았다지만 내게 영화 속 질문에 대한 답 찾기는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늘 진행형이다. 지나간 시간을 딛고 오늘에 선 것처럼 오늘을 딛고 내일에 서서 기억 속을 찾아 헤매지 않아야겠다. 가끔은 해질녘 강가에서 튀어 오르는 물고기의 비늘만큼이나 선명하게 반짝이는 기억을 부지런히 건져 올리고 볼 일이다. 모범 답안을 여러 개 만들어 놔야 선택의 순간 덜 망설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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