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없이 밤을 지새우기에는 10월은 아직 서늘한 계절이다. 그럼에도 병문안 왔다가 곁 빈 상태로 있는 나를 두고 친구들은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친구들은 밤을 새며, 갑작스러운 진단을 받고 내가 혼란스러워할 봐 조용조용 다독였다.

무거운 병을 진단받고 찾아오는 혼란은 생각보다 복잡하거나 무겁지는 않다. 물론 진단으로 삶은 Before와 After로 확실히 구별되기는 한다. 하지만 꾸려나가야 할 일상과 가꿔야 할 관계는 여전하다. 영화 ‘Miss You Already’는 참 현실적이다. 환자나 환자의 주변인물들의 속성을 과장 없이 그려냈다. 진단이 떨어지면 환자 중심으로 생각하지만, 환자에게서 건너와야 할 감정이나 역할 등을 전적으로 떠맡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아프기에 홀로 감당해야 할 몫은 어쩔 수 없다. 밀리는 구토와 싸우고 항암의 후유증으로 머리를 밀면서도 남편에게 어떻게 보일까 신경 쓴다. 사람들이 자기를 동정할까 봐 끙끙댄다. 밀리가, 생일 파티에 지인들을 다 초대한 남편에게 화를 내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절망적인 상황에선 겉치레 위로보다는 따뜻한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가까이에서 죽음을 직접 목도하거나 영화로 만나면서, 죽음이 거창하거나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간다. 또 자연스런 삶의 과정에 있는 죽음 속에서 피워 올리고 싶은 사랑이 있음을 안다. 영화는 그 정제된 사랑의 감정을 담담하고도 세세히, 또 가볍게 파고든다. 딸에게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하는 밀리나, 오해와 혼돈의 시기를 지나 밀리의 마지막을 따뜻하게 지켜 주는 남편이나 친구 제스, 그리고 어설픈 엄마 미란다는 각자의 사랑법으로 사랑을 했다.

가볍게 그렸다고 해서 죽음이 쉬운 일은 아니다. 밀리가 말했듯,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렵고, 그래도 철저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 두려움을 나눌 가족과 진정한 친구가 있다면 용기를 갖고 걸어갈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밀리가 마지막을 보내는 방은 추억으로 덕지덕지 치장되었다. 죽음이 찾아오기 훨씬 전부터 그녀 생의 단편마다를 기록해 놓은 사진은 묵묵히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준다.

영화는 우정에도 주목한다. 바쁜 엄마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늘 붙어 지내던 제스와 밀리는 삶의 변곡점마다 특별한 경험을 공유하거나 옆에 서 있다. 첫 만남, 첫 키스, 첫 임신의 푸르고 싱싱한 기억들뿐만 아니라 삶의 갈피마다에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다. 그러기에 선고 이후 밀리의 크고 작은 변화들을 제스는 진심으로 지켜봐 줄 수 있다. 아프고도 유쾌하게 말이다. 멋쟁이 밀리가 만삭의 제스에게 가장 아끼는 하이힐을 주며 이별을 고하고, 제스는 밀리 앞에서 뒤뚱거리며 하이힐을 신고 걷는다.

밀리의 변화들을 담담하게 수용해 내는 제스의 모습은 아름답고도 성숙하다. 값싼 동정으로 밀리를 초라하게 만들지 않는다. 다만 받아주고 밀리 입장에서 필요한 것들을 해 줄뿐이다. 애도는 모든 것이 끝난 후에 해도 늦지 않다는 듯. 오랜 세월 서로를 지켜온 힘이 있기에 마지막까지 함께한다. 잔잔한 파문이 인다.​

한 편의 영화가 위로가 된다. 추억 속에서, 진짜 사랑하는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길은 외롭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너무 무겁지 않은, 한 편의 슬픈 코미디 같은 영화가 끝나고, 내 곁엔 어떤 친구가 있나 떠올리는 마음이 외롭지 않다. 까맣던 밤이 푸른빛을 거쳐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병실을 지켰던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위로를 받은 여러 방법 중에, 사람이 답의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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