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게으르다’는 낱말과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직장을 두어 번 옮기면서 쉼없이 연달아 출근을 했고, 두 딸을 키우며 맞벌이 엄마로 살 때도 밤 10시 전에는 엉덩이를 붙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큰딸이 일기장에 엄마의 일이 빨리 끝나서 그림책을 많이 읽어줬으면 좋겠다고 썼을까.

그렇게 달려온 이력이 붙어 ‘한가하다’거나 ‘멍때리는’ 기분을 온전히 즐기는데 서툴다. 게으름도 천성이라더니 나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이름인가 생각하던 차에 〈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우르슐라 팔루신스카 글․그림, 이지원 옮김, 비룡소)을 읽었다.

습관이 어디 갈까. 글자는 찾아보기 어려운 64쪽의 그림책을 후루룩 보곤 치우려고 했다. 게으르게 살라는 말이구나, 이렇게 살아도 좋겠구나라는 생각만 들어올렸는데 여느 때처럼 바쁠 연말과 내년을 다시 그려보라는 듯 노란색과 검은색의 강렬한 표지가 계속 따라다니지 뭔가.

결국 다시 책을 들었다. 천천히 숨을 고르고 마치 내가 이 책을 만든 저자가 된 것처럼 공을 들였다. 그리곤 지난 한 해를 돌아봤다. 내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여유가 있었던가. 내가 하던 일을 멈추고 편하게 드러누웠던 적이 얼마나 되던가.

책은 단순히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속에 들어가야 뭐든 느낌이 오고 감동이 깊어진다. 더구나 책의 제목과 담고 있는 이야기가 온통 게으름인데 후루룩이라니.

책 속의 인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삼촌은 신문을 읽고 이모는 감자를 곁들인 저녁을 준비한다. 이웃집 목수 아저씨는 지붕을 고치고 스카우트 대원들은 불침번을 선다. 우리는 부지런해야 잘 산다는 말에 너무나 많은 것을 내줬던 것은 아닐까.

저자는 그런 삶을 사는 데 익숙한 우리에게 색다른 그림을 선보인다. 일단 시선이 옆을 바라보거나 아래를 내려다보는 게 아니다.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누워 있다. 그래야 태양을 따라가고 바람을 살피며 낯선 이름들과 마주 볼 수 있다는 듯.

나란히 누워 올려다보니 삼촌은 신문을 읽는 게 아니라 글자 사이로 보이는 햇살을 즐기고 있고 목수 아저씨는 지붕 사이로 보이는 숲의 말에 빠져 있다. 단순히 버둥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에우제벡은 거미줄을 휘젓는 사고를 쳤지 뭔가.

고개를 들면 하늘만 보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건 선 채로 올려다봤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게으름을 제대로 피우려면 드러누워야 한다. 내가 세로가 아닌 가로가 되었을 때 열릴 세상을 가늠해 보니 생각만 해도 입이 헤벌쭉 벌어진다.

저자는 강렬하고 화사한 색감을 풍부하게 풀었다. 말은 줄이고 그림에 빈 공간을 넉넉하게 뒀다. 한 마디로 넘치게 여유롭고 한껏 편안하다. 2017년 상하이 도서전에서 아동 문학상을 수상한 이유를 알겠다.

책 한 권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는 없겠지만 나의 과거를 기억하는 내 몸과 마음이 적당히 쉬었다 갈 때가 됐다고 이 책을 들이밀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이어리는 채워 나갈 때의 기쁨으로 쓴다. 이제부턴 얼마나 비울 수 있나 엇나가는 게으름을 맘껏 누리고 싶다. 내가 세로가 아닌 가로가 됐을 때 보일 세상이 너무나 궁금하다. 내년의 화두는 ‘게으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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