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사관학교 생도였다. 축제 같은 특별한 날에만 공개된다는 내무반에 들어섰을 때 그의 책꽂이엔 그 흔한 연애소설 한 권 없이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 청아출판사)만 덜렁 전공서적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참 자기 일과 어울리는 책을 읽고 있구나 싶었다. 군인을 희망하는 그의 직업과 무거워 보이는 책 제목이 그렇게 다가왔던 거다. 나중에 책을 들었을 때도 왜 이 책이 그의 책꽂이에 있었을까, 어떤 부분이 그를 건드렸을까 궁금한 마음이 컸다.

그런 시선으로 읽으니 저자가 정신과 의사가 아닌 119, 104번으로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보낸 시간만 들어왔다. 그는 가축우리 같은 건물에 구겨져 철로에서 땅을 파고 선로를 부설하는 일을 하면서 추위와 굶주림은 물론 죽음의 공포와도 싸워야 했다.

게다가 아버지, 어머니, 형제 그리고 아내가 모두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았다. 역사책을 읽으며 분개하고 넘겼던 몇 줄의 내용이 어찌나 생생하게 충격을 주던지. 역사를 만드는 인간에 대한 고민이 그렇게 내 안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런 충격과 고민은 먹고 사는 현실적인 문제와 남편이 군인의 길에서 벗어나면서 희미해졌다. 그렇게 한동안 잊고 지내다 심리학에서 이 책을 많이 다루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들었다. 그제야 보이는 반짝이는 가치. 눈여겨 볼 내용이 정말 많더라.

저자는 수용소의 경험을 바탕으로 ‘로고테라피’라는 정신치료법을 만들었다. 프로이트는 고통을 주는 혼란의 원인을 서로 모순되는 무의식적 동기에서 비롯된 불안에서 찾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와 책임을 발견하지 못한 데에 있다고 본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 자주 인용한 것도 맥락을 같이 한다. 수용소라는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든 사람의 생존능력이 뛰어난 것에 착안했으니 근거가 뚜렷하다고 할 밖에.

로고테라피 중에서 역설의도를 주의 깊게 봤다. 이 기법은 마음속의 두려움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일을 생기게 하고, 지나친 주의집중이 오히려 원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개발되었다.

예를 들어 글씨를 못 써서 고민일 때 아무렇게나 휘갈겨 쓰며 자신이 얼마나 글씨를 엉망으로 쓰는지 있는 그대로 보여줄 거라고 말하는 거다. 잠이 오지 않아 고민일 때도 어떻게든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을 할 게 아니라 반대로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해보라는 것.

물론 이 기법으로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그것에 대해 농담을 할 수 있게 되거나 증세가 점점 약해질 거라는 설명이 반갑다.

남편과 살아보니 같은 책을 읽었으나 나는 수용소의 체험에 머물렀고 그는 로고테라피를 수용하고 실천하는 단계로 넘어가 있었다. 사람도 책도 띄엄띄엄 보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는다.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의미를 실현시킴으로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했다. 오늘부터 저자가 말한 ‘행복해야 할 이유’를 찾아 내 남자와 쭈욱 살겠다.

저작권자 © 반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