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는 수다쟁이인지 모른다.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조용히 있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야기가 튕겨져 나가는 것을 꺼려해 둘이나 셋이 있는 자리를 선호하는 것에서도 욕심을 본다. 사람과 시선을 맞추고 대화하며 공감 나누기를 좋아하는데 여의치 않다 보니 글을 쓰는 건 아닌가 생각한다. 글을 쓰는 것은 말 걸기와 마찬가지다.

된장에 박힌 무에 짠맛이 스며들 듯 사람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안는 버릇이 있다. 지난 시절이 외로워서 사람들 사이에서 걷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밴 습관이다. 어린 시절 엄마에게 한 질문의 8할은 “엄만 나 사랑하지 않지?”였다. 가운데로 자란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형제자매 사이에서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나만 혼났다. 서운함을 내비칠 때마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대답을 들었는데, 그 결핍의 기억 때문에 감정을 주고받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 사이에서 진심으로 바라보고 소통하는 것을 즐긴다. 여태껏 사람에게 가는 마음을 재지 못한다. 감정을 뭉텅이로 주고받기를 좋아하다 보니, 깨지기도 한다.

수필을 쓰면서 나를 만난다. 휙휙 지나왔던 시간의 스펙트럼을 찬찬히 살펴보며 나를 알아간다. 단순하게 살면서 별 문제 없이 지내왔다고 생각했는데, 안에 쌓인 기억들을 소환해 늘어놓다 보면 미처 몰랐던 상처가 건드려진다. 가끔 아파서 왜 글을 붙잡고 있나 후회도 하지만, 수필을 통해 과거의 나를 들여다보며 지금의 나를 이해하는 시간이 귀하다. 정답은 없지만 거울을 들여다보듯 기억을 더듬어 가며 나를 세우는 작업들을 해야 그 다음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제대로 된 걸음마는 이제부터다.

수필을 쓰다 보면 민낯을 보여야 하는 게 어렵다. 기미 낀 얼굴을 화장기 하나 없이 다른 사람에게 내미는 느낌이어서 숨고 싶다. 그렇다고 꾸며 쓰면 글에 힘이 붙지 않는다. 창피함을 내려놓고 깊고 세세하게 들어갈수록 글에서 향이 난다. 솔직하게 쓰지 않으면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글쓰기에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점점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가게 된다. 털어도 또 나오는 ‘내’가 있다.

나는 아직 나와 가까운 주변만 바라볼 줄 안다. 수필은 '무엇을', '왜'를 쓰는 문학이 아니라, '어떻게' 보고 해석하는지를 내보이는 문학이라고 하는데, 내 시야는 아직 좁다. 때론 내 글의 소재는 왜 이것밖에 안 되나 의기소침해지지만, 다 꺼내야 다른 걸음을 갈 수 있다는 선배들의 말을 경청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고 나면, 사람과 세상이 보이지 않을까.

쓰면 쓸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커지고, 문이 열리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나를 들여다볼수록 다른 사람에게 가는 법도 더 잘 알고, 세상에 관한 관심도 많아짐을 깨달아 간다. 이 작업들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속단하기는 어렵다. 꾸준히 대상을 정하고, 관찰하고,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고민하다 보면 자연스레 글의 색깔도 다양해지라 믿는다.

내가 수필로 써내는 일들이 특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경험한 일들인데 괜히 세세하게 건드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을 잘 그리거나 작곡을 할 수 있었다면 더 간략하게 담을 일이기도 하겠다. 다만 누군가가 내 글을 읽으며 아하, 나도 그런 일 있었어, 하며 무릎 한 번 탁 치며 경험 한 자락 꺼내보면 족하다. 아직도 많이 헤매고 있다.

길이 환하게 열려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수필을 내내 써나갈 참이다.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깊게 바라보고, 얻은 생각으로 공감을 나누며 사람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 나의 글 수다가 계속되기를. 이왕이면 나의 수다에 지루해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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