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르륵 웃음소리 끊이지 않는다. 다섯 살, 일곱 살 남매의 장롱 속 이불 탐험은 그저 즐겁기만 하다. 연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남매는 낡은 장롱의 몸체에도,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50여년이 지난 장롱이 여전히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주는 게 신기하다.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하면서 엄마와 아버지는 옛날 장롱을 버리지 못했다. 붙박이장을 짜 넣었기에 딱히 필요는 없었지만 산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것을 두고 갈 수 없었다고 했다. 낡은 것을 끌고 새 집으로 들어가는 게 창피해 밤이슬 맞으며 두 분이 리어카로 옮기셨단다. 의좋은 형제의 짚단 옮기기도 아니고, 상상하면 달밤에 체조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낑낑대며 코미디 한 편을 찍으면서도 두 분은 내 나이보다도 오래 된 장롱을 처음 장만했을 때의 기쁨을 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궤짝 위에 올려두었던 이불이나 일 년에 두어 번 입을까 말까한 정장을 새로 산 장롱에 넣으며 설렜던 엄마의 모습이 삼삼하다. 새것에 밀려, 작은 방에 놓였지만 장롱은 엄마에게 오래 전 소중한 순간을 붙잡게 해 주었다.

오래 된 장롱은 나에게도 추억거리다. 조카 손주들이 뛰어노는 모습은 내 모습이기도 하다. 엄마에게 혼나거나 혼자 있고 싶을 때 장롱 속 이불 위로 올라가곤 했었다. 찢어진 단벌 치마를 입고 친구들 앞에서 조마조마했던 마음을 장롱 안에서는 예쁜 드레스를 입고 어깨를 쫙 펴며 내려놓을 수 있었다. 어떻게 꺼내면 육성회비 이야기에 엄마가 화를 내지 않을까 궁리하기도 딱이고, 엄마의 꾸중을 피해 숨어 있기도 안성맞춤인 공간이 장롱이다.

장롱에 있는 거울 뒤는 어렸을 때 나만의 비밀창고이기도 하다. 껌 모으는 게 취미였던 시절, 껌이 생기는 대로 거울 뒤에 모아두고 부자가 된 양 의기양양해했다. 서울 사는 사촌들이 사 온 과자종합선물세트에서 꺼낸 껌이나, 엄마 몰래 달걀 팔아 산 껌을 모아두고는 얼마나 신나했던지. 나중에 아끼던 껌들이 눌러붙어 못 씹게 되어 깨닫기까지 나에겐 특별한 공간이었다.

지금껏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주는 장롱이 다시 살아난다. 작은방에서 유행에 뒤져 죽어 있는 듯 보였던 장롱이 생기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새로운 추억을 쌓아간다는 사실이 놀랍다. 신나게 놀던 손주들의 머릿속에는 장롱이 나와는 다르게 기억되리라. 공간이나 물건은 사람의 온기와 손길로 끊임없이 숨을 쉰다.

무조건 버리는 게 능사는 아니었던 게다. 엄마가 헌 장롱을 새 집으로 가져간다고 했을 때 말렸었다. 궁상이라고 했다. 새것이 있는데, 굳이 낡은 장롱을 옮겨 온 것을 보고 싫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물건을 살려낸 손주들을 보면서 오히려 내 삶의 태도를 뒤돌아보게 된다. 이사를 하거나 집을 정리하면서 쉽게 버렸던 물건들이 아쉬울 때가 있다. 그 중 엘피판과 턴테이블이 가장 아깝다. 월급을 탈 때마다 사 모은 것인데 다시 그리워질 줄 모르고 소용에 없다고 떼어내기 바빴다. 몇 번의 이사로 아이들을 담아놓은 테이프는 있는데 비디오플레이어도 놓쳤다. 이제 테이프는 어떻게 열어볼까. 생각 없이 산 시간들이 그냥 지나갔다. 달빛 장롱 때문에 헷갈린다.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는 카페 같은 공간에 다녀오면 커졌던 아쉬움이 바로 이런 느낌이었을까.

한편에선 삶의 미덕이 달라졌다. 미니멀 라이프라고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을 지니고 살자는 세상에서 물건을 이고 살자는 건 아니다. 그래도 물건 하나 버릴 때 추억의 질량이나 정도는 한 번 더 생각해 봐야겠다. 헌데 그게 쉬울까. 버리는 것 하나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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