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의 기타제왕 불리는 주인공…재능기부에 보람 느껴…명장한우·비타민 동호회 이끌며 사랑의 음악봉사 활동

이동에 위치한 명장한우에서 만난 최웅구 대표는 20대 청년처럼 싱글벙글이었다. 그는 기타 얘기만 나오면 그냥 흥겨움이 묻어나는 모습 그대로였다. 최웅구 대표가 식당안에서 즐거운 표정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최제영 大記者

명장한우에서 만난 최웅구 대표의 얼굴은 20대 청년같이 주름살 하나 없을 정도로 젊어보였다.그냥 싱글벙글 그 자체였다. 그는 기타 얘기만 나오면 흥겨움이 묻어났다. 고등학교때 부터 손에 익은 기타는 그에게 있어 편한 친구이자 동반자라고 했다. 기타하나면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는 유난히 다문화 가족에 대한 사랑이 넘쳐났다.

그런 이유탓일까. 수년간 다문화 이주민을 상대로 기타를 가르친 적이 있다고 했다. 레슨비는 없었고 돈을 받고 가르친 적이 없다고도 했다. 기타 치는 실력이 수준급인 탓에 어딜가도 인기가 많다고 했다. 충남 공주 출신인 최 대표는 얼마전까지 공주향우회장을 역임했다.

충청인에 대한 자부심도 커보였다. 돈되는 일은 아니지만 기타를 배우려는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를 만나 기타에 대한 애증의 그림자를 살펴봤다.

Q기타는 언제부터 쳤나.

고등학교 시절부터 기타를 사랑했고 달고 살았다. 기타는 앞뒤가 편평한 표주박 모양의 공명통에 자루를 달고 여섯 개의 줄을 매어있는 현악기다. 왼손 손가락으로 줄을 눌러 음정을 고르고 오른 손가락으로 줄을 튕겨 연주하는 악기다.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몇 안되는 현악기라고 말할 수 있다. 기타줄을 튕기는 순간 흥분할때가 많다. 그런 기분도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이가 들면서 기타에 대한 매력만은 떨칠 수가 없었다. 어딜가나 기타 하나면 모든 것을 얻는 느낌이다. 기타하나 동전 한잎이면 모두가 만족이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말이다.

Q다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안산은 다문화 가족이 유난히 많은 도시다. 특히 원곡동 일대를 가봐라. 안산은 다문화와 뗄래야 뗄수 없는 도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6년전 부터 다문화 이주민들과 호흡을 함께하고 있다. 지금은 잠시 중단했지만 말이다. 그들을 대상으로 기타를 가르치면서 친구가 되어버렸다. 이제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공동체적 운명으로 살고 공유해야 한다. 한 국가나 한 사회 속에 다른 인종·민족·계급 등 여러 집단이 지닌 문화가 함께 존재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것은 부인할 수없는 숙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웅구 대표가 안산다문화센터에서 이주민을 대상으로 기타를 가르치고 있다. 최 대표는 이순간이 제일 행복했다고 말했다.

Q이제 함께 가야 할 운명처럼 느껴진다는 뜻인가.

이주민들에게 기타를 가르치며 이런 생각을 많이하게 됐다. 내 자신이 직접적으로 이주민과 관련은 없지만 말이다. 음악은 국적을 떠나 하나로 만드는 묘미가 있다. 음악 즉 악기는 전 세계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유일한 방편이기도 하다. 레슨비는 없었다. 그냥 기타에 대한 재능기부로서 조건없이 했다. 얼마전 그만두게 되었지만 지금도 그들은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어깨를 두드리는 사이가 되어가고 있다.

Q동호회 활동도 했다고 들었다.

그렇다. 비타민 기타동호회를 비롯해 여러 동호인들이 모여 공연도 하고 봉사도 한적이 있다. 길거리 공연도 해보고 사회복지 시설인 여러 요양원에도 동호인들과 함께 기타를 치고 즐거움을 선사한 바 있다. 요양원에 계신 어르신들도 민요 못지 않게 기타를 좋아한다. 누구나 손뼉을 치고 흥겨워하는 모습을 볼때 큰 보람을 느꼈다. 지금은 각자 일이 바빠서 일시적으로 중단했지만 앞으로도 언제든지 다시 뭉칠거라 생각한다.

Q재능기부의 고귀한 뜻으로 읽혀진다.

내 스스로 즐겁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아무리 강요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안산다문화센터와 시흥다문화센터에서 기타재능기부를 하면서 수많은 다문화 가족을 만나봤다. 한국 사람들이 외국인과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고 있다. 우리가 보듬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기타라는 현악기를 통해 소통이 되고 문화를 공유하면서 보람을 느낀 적이 많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다문화 가족은 점점 늘어날게 분명하다. 우리가 반드시 안고가야 하는 이유다.

Q외식업을 하면서 하기 힘든 일 아닌가.

'명장한우' 식당을 하고 있는데, 우선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장사가 잘돼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업을 위해 기타 재능기부를 하는것은 아니다. 요즘도 식당 한구석에 기타를 갖다놓고 레슨을 해주고 있다. 1주일에 몇명 정도가 이곳을 찾아오는데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개방돼 있다. 돈을 받고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식당에서 기타소리를 듣고 궁금해 하는 손님들도 있다. 이제 명장한우에서 벌어지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길거리에서 기타연주에 흥이 녹아있는 모습이다. 그는 기타 줄을 튕길 때가 가장 힘이 솟고 즐겁다고 말했다.

Q배용준이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다고 했다.

잘생긴 배우 '배용준'이라는 이름으로 닉네임을 쓰고 있다. 언젠가 지방에서 나를 찾아온 적이 있는데, 배용준이라는 배우를 상상했다고 했다. 연예인 이름으로 닉네임을 쓰니 역시 여성들한데 인기가 대단하더라. 한때는 '돌쇠'나 '마당쇠'라는 낵네임을 써본적이 있는데, 그보다 훨씬 인기와 관심도가 높다는 사실을 실감했다.(웃음) 요즘도 배용준 형님 또는 오빠라는 호칭을 부르는데 듣기가 참좋다.

Q공주향우회장을 역임하지 않았나.

8대 안산공주향우회장을 맡은 적이 있다. 내 고향 공주를 생각하면서 선후배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지금도 공주향우회는 자주 나간다. 고향 사람들을 만나면 그냥 좋다는 생각을 많이한다. 공주에서 서울로 올라가 사업을 한적이 있다. 동대문시장에서 섬유와 관련된 사업을 했다. 돈도 벌어봤지만 많은 돈을 뙤이기도 했다. 안산으로 와서 외식사업을 하니 마음은 편하다. 돈 뙤일 일은 없지않은가.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Q기타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내가 좋아서 기타를 곁에두고 산다. 아마추어지만 자랑스럽게 기타줄을 튕기고 있다. 손님들이 듣고싶다 할때 때로는 기타를 들려주기도 한다. 2001년부터 '행복과 사랑 나누기'라는 봉사단체에 참여하고 있는데 보람을 느끼고 있다. 지체 장애인의 목욕과 빨래를 해주고 때로는 음식봉사도 한다. 도배장판도 해줄때가 있다.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이란 생각을 한다. 원정식 회장이 이끌고 있는데, 그는 자신이 화상을 입고 도움을 받은데 대한 고마움으로 이 같은 봉사단체를 이끌고 있다. 앞으로도 이 같은 봉사에 게을리하지 않으려고 한다.

인터뷰=최제영 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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