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건 그런 건지도 모르겠어. 우리의 소소한 일상은 아무렇지 않게 흐르고 있지만 때로 뒤돌아보면 약간의 필연이 개입된다는 거. 어느 날 행궁거리를 걷다 아주 오래 전에 영화로 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촬영 장소를 만난 것은, 그 거리 어디쯤 살고 있던 지인 덕분일 걸. 하루에 스며든 영화 한 편도 마찬가지야. 그 또한 어쩌면 오래 전부터 연밥 속에서 영글고 있던 씨가 툭 튀어 나와 말을 건 건 아닐까.

학부 때 작가론과 작품론을 논할 때, 작품은 오로지 작품으로서만 이해해야만 한다는 이론에 반기를 번쩍 들곤 했어. 어찌 작품이 작가나 시대를 떠나 존재할 수 있느냐고, 작품은 그 모든 것의 총합일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지. 근데 말이야.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감독과 배우의 영화를 보고 난 지금 상당히 말랑말랑해져 있어. 휘청휘청 홍상수의 능력에, 능청능청 김민희와 정재영의 연기력에 빨려들고 말아.

영화를 만든 감독은 다분히 우연에 기댔을 거란 생각을 해. 스시 집에선 술을 마셨을 테고, 배우들에겐 힘을 요구하지 않았을 거야. 영화 속 대사처럼 다음을 모른 채 영화를 찍어간 건 아닐까. 아니면 고도로 계산을 했던가. 그 계산이 너무 치밀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걸 거야. 아무튼 영화는 작은 소극장에서 보는 연극과 같았고, 소극장과 관객의 거리만큼이나 우리 일상에도 가까이 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어.

영화는 1부, 2부로 나뉘어 있어. 1부에서 춘수의 독백으로 시처럼 슬쩍 보여 주고 나서, 2부에서 똑같은 시공간을 늘여 감정선을 세세하게 되짚어 줘. 시와 산문이 나란히 있는 느낌이 들어. 마치 시에선 작자의 진짜 모습이 슬쩍 숨을 수 있는 것처럼 1부에선 춘수의 실체가 아련하게 포장되며 둘은 그냥 끝나버리고 말아. 띄엄띄엄 어색하게 서로의 사이에 어색함이 존재하기도 하는데, 끝나버린 추억은 기억자의 편의에 의해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지.

반면 2부에선 산문처럼 춘수가 숨을 곳은 없어. 직접적인 독백이 있음에도 관객에게 호흡을 두어 상상의 여지를 주던 1부와 달리, 2부는 감정 참고서를 꼼꼼히 정독하게 해. 아하,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하며 조금은 실망하기도 하다가, 이해도 하다가. 그건 1부보다 둘 사이를 더 가깝게 만들어. 동시에 관객하고의 거리도 줄여 주어 이야기를 자세히 듣게 하는 힘을 발휘하지. 개인적인 것들을 서로 나눌 때 좀 더 가까워지는 이치와 같아.

영화는 아주 소소한 일상이 살짝 변주되면서 배우들이 툭툭 던지는 말을 묘하게 삼키게 해. 이거 아닌 것 같다, 알 거 같다와 같은 느낌이 수없이 교차되는 우리의 삶은 영화 속에, 또는 그림 속에, 그도 아니면 우리가 쓰는 글 속에 어떤 식으로든 기록되기 마련이지. 모르고 시작해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우리 삶 전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을 설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느낌의 영역으로 둘 것들을 굳이 꺼내 해제할 필요는 없지.

저게 영화 속 이야기인지, 혹시 내가 겪었을지도 모를 일인지 현실과 영화를 오락가락 하며 영화에 집중하는 동안 시간이 훌쩍 가 버려. 두 시간을 끌기엔 참 알맹이가 없는 것 같은데, 그게 또 이상하게 꽉 찬 영화 같아.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결코 아무렇지 않은 이틀을 이렇듯 느슨하면서도 촘촘하게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한번쯤 영화 속 우연에 휘말릴 수 있지 않을까. 주섬주섬 챙겨온 그 이틀을 마음속에 숨기고 평생 그 기억으로 빛날 수 있지 않을까.

올 겨울에 눈이 내리면 영화 보는 내내 익숙한 거리였던 행궁거리를 걷고 싶어. 그렇게 걷다가 “살면서 느끼는 거 매일 확인하고 사는 거에 쾌감이 크다.”는 희정의 말을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어. 그 때 난 이 영화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안고 있을까. 여전히 지금처럼 좋을까.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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