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벗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필터 없이 고민을 내려놓아도 공감지수가 높을 게 뻔하니까. 뿐만일까? 글을 주고받으며 얻는 즐거움도 꽤 크다. 옛 시인들이 시대를 노래하며 시를 주고받는 모습은 부럽기까지 했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들었던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국어 선생님이 조지훈과 박목월의 교류에 대해 알려 주는데 그대로 빠져들었다. 왠지 멋스럽고 부러운 느낌으로 남아 있는 두 시인의 관계를 동경했던 것 같다. 1939년 <문장>지를 통해 각각 등단했지만, 둘이 처음으로 만난 건 1942년 3월이다.

서울에 있던 조지훈이 경주에 있는 목월에게 뜬금없이 편지를 보내고 내려갔다. 아는 거라고는 <문장>지에 나와 있는 조그만 사진이 전부다.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까 생각한 목월은 자기 이름자 석 자를 쓴 깃대를 들고 마중 나갔다.

보름 동안 경주에 머물며 술 좋아하던 조지훈과 박목월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즐거운 교류였음이 눈에 보듯 훤하다. 경주에 있는 동안 조지훈은 박목월에게 ‘완화삼’이라는 시를 보낸다. 경주에서의 시간을 뒤로 하고 조지훈이 서울에 올라간, 그해 10월에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진다.

구속되는 학자들을 보며 신변의 위협을 느낀 조지훈은 도피하며 박목월에게 편지를 보낸다. 목월은 이때 뒤늦은 답시 ‘나그네’를 보낸다. 어느 시가 완성도가 높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그네, 술 익는 마을 등 묘하게 닮아 있는 두 시에서, 당시 떠돌 수밖에 없는 시인들의 고뇌가 전해진다. 힘든 시절 시를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된 시간들을 떠올려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달뜬다. 때로 글은 말보다 훨씬 많은 감정을 전달하니까.

얼마 전 글벗과 핸드메이드 마켓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아침 일찍 일정을 시작했지만 눈요기도 실컷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그랬는지 기분이 붕붕 떠다녔다. 헌데 집에 가까워오자 길이 너무 밀리는 거다. 하루는 더없이 행복하고 좋았는데, 글벗이 수업할 시간에 늦을 것 같아 운전대를 잡은 나는 초조했다.

그 때 옆에서 글벗이 "금요일 오후잖아요." 딱 한 마디하는데 엄청 시적으로 들렸다. 한마디로 하루의 즐거움이 되살려낸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같은 제목으로 시를 써 보자고 했다. 적어도 한 사람쯤은 시를 쓰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글벗이 약속대로 시 한 편을 척 내놓는다.

날씨가/무슨 상관인가요//이 빠진 접시면/또 어때요//같이 하는/모든 게/축복인 것을//하루쯤/얼렁뚱땅 풀어져도//그것조차 어여쁜 우리입니다(황영주, 금요일 오후잖아요)

역시 시인. 그 날 하루의 즐거움이 팍팍 묻어난다. 시를 읽고 나니, 나도 왠지 답시를 써야 할 것 같다. 즐거운 고민이다. 박목월과 조지훈이 주고받은 즐거움이 이런 거였을까 슬쩍 상상해 보기도 했다.

성의껏 답시를 쓴다.

도로에 늘어선 자동차 행렬/신호 바뀌어도 꼼짝을 못해//움켜쥔 핸들에 걱정되었는지/폭죽처럼 터지는 소리,//금요일 오후잖아요//가을 하루 추억으로 묻고 온 발걸음/생각만 해도 입꼬리 올라가는데/체증이 대수일까//암만, 늦은 귀갓길에도/맑게 웃는 그 얼굴 있으니/아무 문제없지(심명옥, 금요일 오후잖아요)

그 날의 기분을 오롯이 담으려 애쓰며 쓰고 고치기를 반복했다. 글벗에게 전달하고 빨리 전달하고 싶어 안달이 나기도 했다. 막연하게 생각한 것보다 직접 해 보니 글을 나누는 일은 참 좋다. 은유가 넘치지 않아도 직설화법으로 건너가는 마음이 정겹다.

금요일 오후, 생각해 보면 참 홀가분한 시간이다. 글벗과 함께하는 길이 내내 금요일 오후 같은 느낌일 것 같다. 때로 글을 쓰는 게 뭐라고 이리 마음을 쓸까 하다가도, 좋으니까 하며 함께 웃을 수 있는 글벗이 있어 좋다. 서로 글품을 팔며 금요일 오후 같은 글을 써 낼 수 있으면 좋겠다, 오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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