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율을 통해 스스로의 존엄을 키워나가고 확인한다. 자율은 간섭 없이 하되스스로의 행위를 책임진다는 의미이다. 그만큼 자율은 높은 가치만큼이나 윤리적 도덕적 자각과 준수 능력이 동반된다.

철새는 긴 거리를 태양의 기울기를 기준으로 삼아 날아간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에게는 철새와 같은 천부적인 능력이 없다. 인간은 익숙한 것을 좋아하며, 익숙해질수록 감각이 둔해지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렇게 인간은 자정능력이 약하기에 사회가 필요한 것이다. 사회가 자극을 주고 명철한 의식을 갖게해야 한다. 나의 관점과 이해가 아니라 공적인 관점과 공공의 이익의 관점을 견지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것을 사회적 감시라고 한다. 사회적 감시의 본질은 감시와 통제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이며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한 선택인 것이다.

서울 시흥동에는 오래 전부터 버려진 아기들을 돌보는 ‘베이비 박스’라는 기관이 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기관의 대표가 부정수급과 후원금횡령 의혹으로 구청으로 부터 경찰에 고발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내용은 대표가 목사인데 교회에서 월급을 받았고 부인도 수입이 있는데 생활보호대상자로서 부정수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후원금 사용에 대한 의혹도 받고 있다고 한다. 10년 동안 아기들을 1500명가량 돌보았고 국가가 해야 할 일을 감당하면서 언론에 조명도 받았는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우선 대표의 삶이 안타깝고 일하는 기관의 실무자들이 받은 정신적 상처가 염려되며 아기들이 걱정되었다. 사회적 감시가 못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잘 살게 하는 방법임을 다시한번 실감했다.

청소년은 사회적 약자이다. 아직은 보호와 양육을 받아야 하는 나이이다. 생물학적으로 그렇고 경제적 조건이 그렇다. 청소년에게 부모는 강력한 힘인데 위기청소년에게는 이 강력한 방어력이 없다. 이것은 생존을 지키는 능력이 없음을 의미한다.

결론으로 부모의 사회적 역할을 하는 사람이 옆에 없다. 따라서 위기청소년의 인권이란 무엇보다 그들에게 부모를 만들어 주는 것이고 이것이 사회적 감시이다. 위기청소년은 다양한 형태로 사회적 보호를 받는다.

공적인 일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보호받는 다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일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일이다. 이것은 보호하는 사람이나 보호 받는 사람이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보호하는 사람도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신의 생존을 관장하고 있는 사람에게 스스로의 권리를 찾으라고 하는 것은 가혹하며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인간은 철저하게 존엄성을 갖고 자라야 하는데 이것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공공의 사회적 돌봄으로 나타나야하기 때문이다.

위기 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 그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어린이 집, 위탁가정, 입양, 시설 등에서 간혹 벌어지는 인권침해를 보면서 오버랩되는 사진이 있다. 자사고 폐지에 반대하는 학부모들의 시위사진이다.

위기청소년의 부모는 이런 저런 이유로 아이에 대한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못한다. 위기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감시가 무엇보다도 시급한 이유이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 사적 지배를 하는 구조와 풍토를 만들면 않된다.

이러한 구조와 풍토는 인간의 존엄성을 명백하게 훼손시키게 되어있다. 사회적 감시의 구조와 풍토를 만드는 것이 청소년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며 그들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다. 조심스럽지만 위기청소년과 15년을 살았던 사람으로서의 확신이다. 애 키운 공은 없다라고 한다. 사회적 감시는 공도 없는 일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위험에 빠지는 위험성을 제거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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