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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돼지들이 똑똑했다는데
반월신문 | 승인 2019.08.29 14:02

양파 값이 폭락이라는데 뭐라도 해서 돕고 싶은 마음에 장아찌를 만들기로 했다. 요리에 자신이 없다는 나를 다독인 친구의 황금 레시피. 양파를 잘라 유리병에 넣은 뒤 전날 끓여 놓은 양념만 부으면 끝이다.

그런데 양파 한 자루를 우습게 봤나. 이내 눈물이 폭폭 쏟아진다. 틈틈이 껍질도 따로 챙기고 밀린 설거지도 하려니 오전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내 식구 먹일 생각에 웃음이 나와야 하는데 단순 노동에 쏟은 시간이 아까워 한숨이 나오니.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 쉐프들은 짧은 시간 안에 근사한 음식을 뚝딱 만들어내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전에 다듬고 씻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 길다는 것을 웬만한 주부들은 다 안다. 그러니 알아서 집안일을 하는 로봇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희망을 가질 밖에.

그런데 이런 생각은 너나없이 같은 듯 인공지능 로봇 개발에 열심이다. 조만간 로봇이 냉장고나 자동차처럼 없으면 불편한 존재가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정말 편해서 좋을 것 같냐고 질문을 던지는 그림책이 있다.

《옛날에는 돼지들이 아주 똑똑했어요》(이민희 글․ 그림, 느림보). 간결한 문장과 쉽고 편하게 느껴지는 조형언어로 현대 문명을 풍자한 이 책은 2006년 ‘한국안데르센상’ 대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저자는 2000년에 가볍게 나눈 상상 속 이야기를 6년 후 책으로 담았지만 2019년의 현실로 읽는 나는 가슴이 서늘하다.

옛날에는 아주 똑똑했던 돼지들. 멋진 건물도 짓고 어려운 연구도 해낸다. 틈틈이 재미있는 춤도 추지만 할 일이 너무 많아 마음껏 즐길 수가 없다. “누가 대신 일을 해 줄 수 없을까?” 궁리하던 그들은 사람들을 도시로 데리고 온다. 다행히 사람들이 똑똑해서 돼지들은 그토록 바라던 춤만 실컷 추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은 아주 똑똑해져서 집을 짓고 도시를 만든다. 그동안 오로지 춤만 췄던 돼지들은 그 자리를 사람들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다. 세상의 주인이 된 사람들은 어떻게 살려나.

그들은 돼지를 잊었다. 그래서 돼지들처럼 할 일이 많다고 척척 로봇을 만들어 낸다. 이제 사람들은 단추를 누르고 로봇이 집을 짓는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나지만 누구라도 그 다음 장면을 그릴 수 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뭉크의 「절규」 등 유명 작품을 패러디한 이 책은 여백이 많다. 마치 물건들로 꽉 찬 대형마트에 있는 게 아니라 변두리 구멍가게에 들어선 느낌. 덕분에 숨을 쉬는 게 편안하다. 날마다 바빠 죽겠고, 과부하가 걸리기 직전의 나에게 책에서 불어 온 바람 한 점은 무슨 의미일까.

자연이 하는 일에 하찮은 게 없듯 내가 먹고 사는 일에도 가치 있고 없음의 구분이 따로 있지 않을 거다. 너무 달리기만 하면 금세 지칠 듯. 쉼도 필요하고 어느 정도 불편함을 감수하고 몸과 머리 쓰는 걸 귀찮게 여기지 않아야 인간으로 제 몫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불쾌한 골짜기’라는 말이 주목받고 있다. 로봇이 인간과 닮을수록 호감도가 증가하다가 어느 구간에서 갑자기 강한 공포감이나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책에 담긴 이야기가 현실이 되는 삶.

앉은 자리를 비켜 줄 것이 아니라 편하게 앉는 지혜가 필요한 지점에 온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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