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가 아니면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몇 년 전, 미디어 아트로 재현된 고흐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진품이 아니라며 그냥 넘겨 버렸다. 고흐전이 열릴 때마다 달려가던 마음과는 완전히 달랐다. 학창시절에 쓰던 연습장 앞표지에 인쇄된 명화 정도로만 여겼기에 쉽게 닫아 버린 마음이다.

제주 여행 중 우연히 지인에게 ‘빛의 벙커 : 클림트’ 전시를 소개 받았다. 미대 다니는 딸이 한때 관심을 두던 작가였고, 일정을 정하지 않았기에 소개 받자마자 바로 이동했다. 검색을 하지 않고 ‘클림트’라는 말에 홀려 움직인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아는 게 없으니 익숙한 것이 없고, 욕심이 없으니 전시에 대한 기대가 없다. 더구나 벙커에서 열리는 전시회라니. 번듯한 건물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익숙하던 터라, 궁금하지만 살짝 걱정도 된다. 꽝이면 어떡하지.

매표를 하고 들어서니, 벽면에 전시에 대한 설명이 빼곡히 적혀 있다. 글씨가 어릿거려 제대로 읽을 수 없다. 날것으로 부딪치자 맘먹고 전시장으로 들어서니, 음악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다채로운 이미지가 쏟아진다.

바닥이며 벽면에 빔 프로젝트에서 쏜 이미지가 가득하다. 심지어 기차는 벽에서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관람자는 웅성거리고, 빛과 색채는 현란하고, 음악소리는 크다. 이미지들이 움직이니 살짝 어지럽기도 하다. 클림트 이름 하나 붙들고 들어섰는데, 낯선 이미지들뿐이라 적잖이 당황스럽다.

공간을 이동하니 사람들이 바닥에 앉아 앞의 벽면을 바라보고 있다. 익숙한 화가들의 그림이미지들이 벽이며 바닥의 공간을 쉴 사이 없이 채웠다 사라졌다 한다. 그제서야 전시의 형태를 이해한다. 나도 바닥에 자리 잡고 앉아 본격적으로 작품 감상에 들어간다.

잠시 피카소의 그림이 지나가고, 에곤 실레의 누드 그림이 많이 지나간다. 클림트는 비중이 크다. 클림트의 ‘키스’뿐만 초상화, 풍경화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 덕분에 찬란한 황금빛으로 기억되던 클림트를 자작나무 가운데도, 꽃이 활짝 핀 정원에도 세워 본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시에 몰입되어 간다. 들판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편하게 그림을 감상하는 느낌이다. 바닥에 채워지는 이미지들 덕분에 그림 속에 내가 직접 들어가 있는 느낌마저 든다. 전시는 작가별로 돌아가는데, 앉아 있기만 하면 작품이 내게 찾아오는 느낌이다.

참 편한 관람이다. 처음 들어보는 훈데르트 바서라는 사람의 설치예술작품 이미지들은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뒤로 움직이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벽면을 타고 내리는 비에 바닥에 물웅덩이가 고이는 이미지는 발을 담고 텀벙대고 싶게 만든다.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섰기에 온전히 몰입한 시간들이다. 살짝 눈물이 난다. 작품을 남긴 화가에게도, 미디어의 힘으로 작품을 재해석해 살려낸 손길에도 고맙다. 전시장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보니 흐뭇하다.

뭔지 모르고 부모 손에 이끌려 구경했더라도, 이런 경험에 노출된 아이들이 보는 예술은 다르겠구나 싶다. 뛰어다니는 아이들 속에 훗날 또 다른 예술품을 현대로 살려낼 아이가 있을 듯도 하다.

놀라운 경험이다. 문명의 혜택을 잘 누리고 살면서도 예술에 미디어가 결합되는 걸 은근히 터부시한 속내를 들여다본다. 액자 속에 갇혀 버릴 작품을 세상에 풀어내는 게 미디어의 힘일 텐데, 고리타분하게 진품만을 보기를 고집하다니.

시간도, 비용도 안 되면서 눈만 잔뜩 높여놨었다. 3D로 출력된 고흐의 그림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전시도 있다고 하니, 예술의 문턱은 점점 낮아질 거다. 예술은 대중 속에서 숨을 쉬어야 더 아름답고 가치 있다.

예술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예술품을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재해석해 현대로 끌어다 주는 손길들을 존경한다. 이제 미디어를 통해 예술과 음악에 에워싸이는 경험을 기꺼이 즐기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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