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가뭄 뒤에 장맛비가 쏟아진다. 메말랐던 골목마다 물이 흐르고, 푸석거리던 내 마음도 정화의 기쁨을 누린다.

‘무병장수 기원 사진 촬영’하러 가는 날. 사진 봉사를 가는 사진반 선생님의 보조를 자청하고 길을 나섰다. OO노인복지관까지 걸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신발이 젖어도 마음은 한없이 너그럽다. 복지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선생님을 만났다. 그는 수년째 장수 사진을 찍어 주는 봉사를 하고 있지만 매번 긴장이 된다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친절한 복지관 직원의 안내를 받아 3층 강당으로 올라갔다, 복지관을 들어설 때부터 들리던 경쾌한 트로트 음악소리가 긴장을 풀어주는 듯하다. 예상대로 노래의 근원지는 강당 안이었다. 사진 장비를 들고 강당 안으로 들어서자 어르신들이 박수를 선사하며 반겨준다. 뜻밖의 환대에 환한 미소로 인사를 나누었다. 강당 한쪽에서는 미용봉사단이 책상 위에 화장품을 가득 펼쳐놓고 어르신들에게 화장과 머리를 손질해주고 있다.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새색시처럼 곱다.

단상의 중앙에 덩그러니 의자 하나가 놓여있다. 사진반 선생님이 조명과 위치와 거리를 맞추기 위해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나는 시키지도 않은 모델이 되어 의자에 앉았다. 이 자리에 앉은 어르신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볼 수 있을까.

단상 아래의 어르신들을 바라본다. 이미 손질을 마친 어르신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따라 어깨를 들썩인다. 잔칫날에나 입었을 한복을 입고 서로의 옷매무새를 매만져준다. 딱히 흐트러지지도 않은 화장과 머리에도 괜히 헛손질이 오간다.

여고생들처럼 핸드폰 카메라로 복지관 직원들과도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오늘의 모습들을 사진기로 옮겨 놓는다. 사진기 앞에만 서면 자동으로 내미는 손가락의 V모양이 천진난만하다. 모두 소년, 소녀처럼 웃는다.

준비를 마친 어르신들이 한 분씩 의자에 앉는다. 정작 선생님의 카메라 앞에서는 어색한 표정이다. 그리고 이내 덤덤하게 무언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영정사진을 장수 사진으로 바꿔 부른다고 속뜻을 모를 리 없겠지만 죄다 모른 척하기로 했나 보다.

감추려다 보니 오히려 더 선명하다. 선명함이 분명하게 살을 가른다. 장수 사진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유용하게 쓰인다. 어쩌면 당장 내일 닥칠지도 모른다. 허둥댈 가족들과 마지막 배웅을 하러 오는 지인들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 사진을 준비하는 것이다.

어르신들의 의연한 모습과 반짝이는 눈빛. 남아있는 빛을 쏟아내며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는 노을이 이보다 아름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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