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던 시절의 바람은 덜컹대는 이삿짐 차를 타보는 것이었다. 온갖 살림살이가 실린 짐칸에 앉아 어딘가로 떠나는 모습이 왜 그리 재미있어 보였는지. 전학을 가거나 오는 애들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이삿짐을 쌀 일이 생겼는데 문제는 이사가 반복될 때마다 한 단계씩 삶이 쭈그러진다는 데 있었다. 결국 아버지는 여러 가구가 마당을 나눠 쓰는 어느 허름한 집에서 삶을 마치셨다.
그런 나의 지난 날이 마냥 칙칙한 게 아니라 빛나는 봄날이었음을 일깨워 주는 책을 만났다. 유현준 건축가가 쓴 《어디서 살 것인가》(을유문화사). 그는 훌륭한 건축은 건축주와 함께 만들어 간다는 생각으로 각종 매체를 통해 건축을 쉽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책은 그 연장선이다.
그는 건축의 상대성 원리로 말문을 연다. 한 명의 사람이 그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 잘 표현되는 것처럼 건축물도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사람과 맺는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집은 같은 집이라도 사용자에 따라 다른 집이 된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를 배제하고 그 건축물을 이해하거나 평가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과 건축은 불가분의 관계이므로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면서 의미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가 양계장에서는 독수리가 나오지 않는다며 교도소 같은 학교 건축을 비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고 밥상에 둘러앉아 마주 보며 밥을 먹는 식구가 더 돈독한 가족애를 갖고 있는 것처럼 사옥도 서로 바라볼 수 있는 대형 공간과 수평적 구조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좋은 건축에 대한 고민 끝에 나온 방안이다.
그는 책 제목에 대한 이런저런 제안을 거절하고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선택했다. 어느 동네로 이사 가고, 어느 아파트 단지에서 몇 평짜리에 살 수 있나를 고민할 게 아니라 스스로 그 공간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고민해 보라는 의미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을 더 화목하게 만들기 위해서 건축을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가 어렸을 때 상을 받아 오면 고부간의 갈등이 있던 할머니와 엄마가 한마음으로 기뻐하던 기억을 떠올리곤 잘 만들어진 건축물은 ‘상을 받은 어린아이’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기도 하다.
자연과 사람이 그리 멀지 않은 건축이 좋다는 그의 말에 의하면 나는 좋은 집, 좋은 동네에서 살았다. 여름이면 작은 텃밭에서 콩이나 옥수수, 가지 등을 땄고, 겨울이면 땅 속에 깊이 묻은 무를 꼬챙이로 꺼낸 추억이 있다.
비록 아버지는 단칸방에서 돌아가셨지만 그 마당에서 초상을 치를 때 다닥다닥 모여 살던 이웃들이 같이 울어 주고 안아 주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금방 망가지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의 온기를 온 몸으로 느낀 셈이다.
나는 어디에 살아야 할까.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꿔야 한다는 글쓴이의 말에 공감하니 앞으로도 내 삶의 배경은 자연과 사람이 되어야 하리라. 굳이 산골이나 섬을 찾지 않아도 자연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면 참 좋겠다.
그런 면에서 안산은 좋은 도시다. 자기가 사는 터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책을 책장에 꽂는데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