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옥 수필가

본 지 열흘이 훌쩍 지났는데도 난 아직도 영화 ‘아무르’를 쉽게 놓지 못하고 있다. 설거지를 하다 문득, 청소기를 돌리다 문득, 그렇게 문득문득 주인공 안느와 조르주의 뒷모습을 가슴 아프게 좇고 있다. ‘왕의 남자’에서 죽은 광대들이 벌판을 너나들이 웃으며 걸어가는 에필로그에 붙잡혀 헤맨 느낌과 비슷하다.

죽음에 대한 담론을 하기에 영화는 너무나 현실적이다. 있는 그대로여서 오히려 너무 힘든 영화다. 안느와 조르주를 지켜보며 수면 아래 가라앉았던 슬픔이 일렁였다. 하루가 다르게 육체에 갇혀 가는 영혼, 영혼의 감옥이 되어버린 몸을 붙잡고 마지막을 향해 가던 시어머니 얼굴이 안느의 얼굴에 자꾸 오버랩 되어 나도 모르게 빨려들어 갔다. 심리적 거리 유지에 실패한 채 영화 속에, 그들 옆에 내내 함께 있었다.

삶이 변화될 수 있다는 메시지는 특별한 날에 날아든 건 아니다. 아무렇지 않게 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밥을 먹다 문득 안느에게 다가온 암시는 조르주를 불안에 떨게 하며 점점 구체화된다. 철 지난 꽃잎처럼 시득부득 말라가는 안느를 간호하는 사이, 늙은 조르주는 지쳐 가는데, 그건 지극히 일상적인 흐름 속에 있다.

죽음은 일상 속에 서서히 잠식되어 들어오는 삶의 이면이라 말한다. 영화는 스토리 전개상 크게 필요할 것 같지 않은 먹고 자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씻는 모습을 지루할 정도로 길게 보여 준다. 당황하고 쩔쩔매지만 조르주와 안느는 각자의 자리에서 흐트러진 일상을 잘 일으켜 세우며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아무렇지 않은 듯 같이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끝이 가까워졌다는 걸 알면서도 두려움을 꾹꾹 누르며 아버지의 한 끼 식사에 목숨을 걸던 나처럼 말이다.

가벼운 일상을 지킬 힘을 잃고 와르르 무너졌던 안느를 이해한다. 생리적인 현상마저 도움을 받아야 함을 깨달았을 때, 안느는 조르주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삶이 빛났던 만큼 죽음 앞에서도 지켜내고 싶은 자존심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일찌감치  연명치료를 단호히 거절한 우리 시어머니나, 병원행을 끝내 거부한 안느, 두 사람을 보면서 숭고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낀다.

왤까? 죽음에 대한 대서사시 같은 영화에 왜 지극히도 평범한 ‘아무르’(Amour, 사랑)라는 제목이 붙었을까. 정교하게 영화를 만지는 감독의 능력이라면 제목도 완전하게 뽑아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끌림 가득한 영화를 두 번째 보고서야 완전히 풀렸다. 내 경험에 빠져 온통 센서를 죽음에 맞춰 놓았기에 미처 사랑을 보지 못했던 거다. 다시 보니, 영화는 무심한 표정, 외투를 벗고 입는 일상적인 동작, 짜증스런 대답 하나까지도 모두 ‘사랑’이란 점으로 모이고 있었다.

참 웅숭깊은 사랑이다. 존엄한 죽음까지도 지켜 주는 사랑을 함부로 판단할 일은 아니다. 오랜 세월 함께하면서 다져진 견고하면서도 깊은 우물 같은 사랑이다. 조르주와 안느는 취미와 문화를 공유하고 서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의 축대 위에 추억을 쌓아올렸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당신 유난히 오늘 예쁘다고 내가 말을 했던가,라는 작업성 농담을 날려도 하나도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사이였기에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변화가 힘들었을 텐데도 두 사람은 서로를 배려하고 제대로 사랑하고, 마지막까지 함께한다.

영화를 보고 소복소복 쌓인 내 안의 감정들을 다시 들춰내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사람의 생애에 외투를 입혀 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울림을 마음 깊이 끌어안는다. 끝내 내가 기억할 영화 목록에 ‘아무르’를 넣으며, 채 풀어놓지 못한 여운을 접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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