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을 맞이한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순간이다. 출생도 중요하지만 임종의 순간이야 말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마지막 순간을 같이 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장례식에 함께하는 많은 사람들은 어쩌면 다 같이 슬픔을 위로하고 힘이 되어주는 시간이다.


청첩이 있어야 가는 결혼식에 비해 장례식장은 부고장을 받지 않고도 소식만 듣고도 조문을 가는 사람들이 많다. 가끔 호상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는데 어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순간을 호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만수를 누리다 떠난다 할지라도 소종한 사람을 잃는 가족에게 결코 호상은 있을 수 없다.


임종을 위한 준비를 미리 철저하게 준비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먹고 싶은 거  가보고 싶은 곳을 힘닿을 데 최대한 다니면서 이별의 순간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도 막상 임종이 닥치면 그 슬픔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어쩌면 장례식장은 이런 사별에 대한 추모할 준비를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살아서 다하지 못한 많은 것들에 대해 사후에도 두고두고 추모할 묘지나 납골당을 준비하기도 하고 수목장이나 바다나 강에 뿌리기도 한다. 인생에 한 번 밖에 없는 임종의 순간에 같이하는 가족의 모습도 여러 가지 유형이 있는 거 같다.


평생을 지극 정성으로 함께 모시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그런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도 많은 거 같다. 특히 장례식장에서 갑자기 맞이하는 죽음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가족 간에 싸움이 생기는 경우도 있는 거 같다. 더 해드리지 못해 오는 서운함을 참지 못해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임종자의 곁에서 온갖 고생 다하며 보살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노고를 알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다 장례식장에서 그 서러움이 폭발하는 가족을 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임종 앞에 누가 덤덤할 수 있겠는가? 어떤 장례식장에서는 조문객들의 조의금을 각자 자기 손님이라고 장례가 다 끝나기도 전에 챙겨가는 바람에 장례비를 치룰 돈이 없어 해프닝이 벌어지는 겨우도 종종 보곤 한다.
슬픔을 같이 나누고 위로하는 자리의 조문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렇지 못한 장례식도 있는 거 같다.


부고를 알면서도 굳이 조문을 하지 않는 이해관계가 복잡한 경우도 많은 거 같다. 관계를 위해 조문하는 경우가 그렇다. 슬픔을 나누기 위한 조문이 아니고 조문자리에서 조차도 상주에게 동안의 서운함을 말해 서로가 불편한 자리가 되는 경우도 많은 거 같다.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한 진정한 추모의 조문이 되지 못하는 씁쓸한 경우도 종종 있다.


인생에 딱 한번 밖에 없는 죽음 앞에 진짜 함께 해야 되는 사람은 조문을 온 한명 한명이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고인의 가족에게나 주변 사람에게 이 장례식이 갖는 의미는 남은 생을 살아가면서 꼭 갚아야 할 빚인지도 모른다. 또한 살아서 다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마음을 달래고 준비하는 중요한 순간이다.


살아서 누리거나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조금의 후회도 없도록 상주로서 다하는 가족에게 장례식장이 갖는 의미는 너무도 큰 것 같다. 그래서 ‘부고는 소식만 듣고도 조문을 간다.’ 는 말이 있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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