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나선 길에서 만난 나무 한 그루를 오래 들여다본다. 여름에 들어서는 사랑나무는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는 듯 짙푸르다. 낯선 방문객에게 쉽게 마음을 열어 보이지 않을 모양이다.

사랑나무는 화천군 거례마을에 있다. 유유히 흐르는 북한강가에서 400여년의 세월을 홀로 버티느라 한때 왕따나무로 불리기도 한 느티나무다. 뿌리가 다르지만 가지가 연결되어 한 나무로 자라는 연리지 나무처럼,

가지끼리 붙어 자라서 사랑나무라고 한다던데 확인은 어렵다. 어떻게 왕따나무에서 사랑나무로 변했는지 갸웃거리는 고개만 바쁘다.

이름이야 어떻든 사랑나무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살아남았다. 춘천댐 건설로 거례마을이 수몰되기 전까지 언덕 위에 자리했던 사랑나무는 지금은 평지에 있다. 주변에 비옥한 농토가 많아 사랑나무는 농부들에게 넉넉한 그늘을 내어 주었다.

농사일을 하다 힘이 들면 마을 사람들은 잠시 그 그늘에 기대 땀을 식히곤 했다. 4대강 사업으로, 농토마저 공원으로 바뀌는 바람에 이제 사랑나무는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만 맞이한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려 왔지만 사랑나무는 한결같이 넉넉한 그늘을 갖고 있다. 나무 전체를 사진에 담으려고 멀리 떨어져 보니, 나무 아래에 있을 때보다 그늘이 훨씬 넓어 보인다. 여남은 명이 자리한 곳은 겨우 그늘 한 귀퉁이일 뿐이다. 사랑나무가 속내를 보이지 않는다고 갸웃거리던 고개는 금세 먹먹함으로 숙여진다.

오래도록 아버지의 넉넉한 그늘이 가늠이 안 되었다. 사랑이 없어 보이는 아버지의 가난과 무식함이 싫었다. 반에서 육성회비를 꼴찌로 내면서 창피하거나, 오빠만 공부시키려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기에 원망이 컸다. 학업과 아르바이트에 매달리느라 풋풋하게 보내지 못한 청춘 시절이 아쉬울 때마다 아버지의 품을 의심했다. 마흔이 넘어 가장으로서의 자리를 생각하고 나서야 겨우 아버지에 대한 의심을 풀 수 있었다.

차마 다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사랑은 소낙비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임종을 앞두고 섬망증세를 보이던 아버지가 내뱉은 한마디에 진심이 가득했다. “그래도 애들을 고등학교까지는 가르쳐야 하는데...” 결혼해 가정을 일궈 성장한 아이들을 둔 우리들은 아버지의 멈춘 시간 속에서 여전히 가르쳐야 할 자식들이었다. 뒤엉킨 기억으로도 아버지는 끝내 우리를 교육시켜야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가 인색하다며 서운해했던 모든 일들을 다 씻어 내리는 눈물이었다.

아버지는 외롭지 않았을까.

가신 다음에야 엄마의 입을 통해 듣는 아버지는 내가 알던 분과는 조금 달랐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형수 손에 자라 배곯는 게 싫었던 아버지는 악착같이 일에 매달렸다.

숟가락 두 벌과 깨진 그릇으로 시작한 신혼살림에서 아버지가 기댈 곳은 오로지 당신의 몸뿐이었다. 나무를 해 십 리길을 지고 나가 판 돈으로 기저귀감을 끊어오던 아버지는 내 기억 속에 없었다. 힘든 일을 하면서도 가족밖에 몰랐던 아버지는 왕따나무이자 사랑나무였다.

아버지가 점점 깊게 온다.

빵 하나 사 먹지 못하고 맹물로 배를 채우며 나무 장사하던 아버지가 달려온다. 6년 내내 달리기에서 등수에 들지 못하다, 앞서 달리던 애가 넘어지는 바람에 3등으로 골인한 나를 보고 환하게 웃던 아버지가 보인다.

되새길수록 가난한 내 아버지의 사랑 노래는 서툴지만 깊다. 한 걸음 떨어져서야 속속들이 보이는 사랑, 쨍한 사랑노래의 주인공은 바로 아버지다.

이제는 운동화 밑창을 뚫고 올라오던 빗물과 모래알까지도 웃으며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큰 나무로 다시 선 아버지가 마음속에서 그늘을 넓게 펼쳐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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