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시계 속에 갇혔는지, 쉽사리 그해 여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감 번지듯 어느 하루가 여름 전체로 흘러들어 통째로 물들여놨기 때문이다. 조용히 책상 위 볼펜을 들어 코끝에 댄다. 향긋한 나무향을 붙잡고 숲길 걷듯 그 하루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날은 유난히도 더웠다. 52년 만에 찾아온 무더위라지만 아침부터 열기가 장난 아니었다. 서둘러 식물들이 불볕더위와 맞서 버틸 하루치 물을 주는데,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맨손으로 땀을 훔치면서도, 좀처럼 요구하지 않던 그녀가 공방으로 가자며 짓던 묘한 표정이 떠올라 설렜다.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광교의 어느 공방엔 깜짝 선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나무 내음에 홀려 공방 안 작품들을 눈으로 좇고 있는 사이, 그녀가 내민 조그만 상자에 수제 볼펜이 한 자루 들어 있었던 거다. 그것도 내 이름자 석 자와 내가 좋아하는 문구가 새겨진 볼펜이 말이다. 생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한 날도 아니어서 선물의 의미를 몰라 갸웃거리는데, 그녀의 한마디가 온전히 스며든다. “이다음에 수필집 내서 사인할 때 쓰세요.”

마음에 마음이 덧입혀져 특별한 선물이 된 수제 볼펜 한 자루를 들여다본다. 공방에서 선물을 건네던 마음에 나에 대한 배려가 가득하다. 내가 그런 공간을 엄청 좋아할 거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선택이다. 그곳을 가자고 졸랐던 때의 묘한 표정을 뒤늦게 눈치 채는 기쁨과 만든 이의 정성을 덤으로 얹어준 최상의 선물을 받은 셈이다. 만든 이를 만나게 해 주고,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지도 느끼게 해 준 마음 씀씀이가 깊이 박힌다.

그녀의 작전은 대성공이다. 공방 주인의 설명에 과장이 없는데도 남미에서 온 나무라 하면 나는 이미 그 숲에 가 숨을 들이마시고 있고, 무늬를 이야기하면 어느 새 나무는 초록잎을 달고 우뚝 서 있었다. 아무리 작아도 저마다 결과 향을 갖고 있는 나무 작품들에 그냥 빨려들어 가던 순간들, 끌림이 무방비로 나를 풀어놓던 기억들. 공방에서의 하루는 그 후로 오랫동안 떠올랐고, 또 앞으로도 수없이 떠올릴 날이다.

그녀의 말을 다시 곰삭혀 본다. 글을 쓰다 가끔 길을 잃을 때가 있는데, 마음을 다잡는다. 좋은 나무 구하는 데 공을 많이 들인다던, 멋 내고 싶은 욕심을 참는 게 제일 힘들다던 공방 주인의 말도 곰곰이 되새김질해 본다. 때로 글을 씀에 있어 욕심을 부린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마음을 담는 게 먼저라면서 멋을 내고 싶어 안달하기도 하고, 기교부린 문장을 쳐내면서 아까워한 적도 있다. 문장에서 힘을 빼는 일은 매번 힘들다. 최소한의 손길로 나무 본연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심미안처럼 글을 쓰는 데도 쓸데없는 문장을 버리는 눈이 필요하다.

그해 여름날 밀려오던 따뜻하고 밝은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알 수 없는 시공을 거쳐 내 손 안에 들어온 작은 나무 세상, 그녀가 내게 선물한 것은 단순히 수제볼펜 한 자루가 아니다. 공방을 오가며 달뜨던 마음, 상상 숲에 서 있는 즐거움, 글에 대한 애정도 모두 느끼게 해 준 것이다. 욕심을 버리고 한 줄이라도 사람에게 온전히 안길 문장을 담은 수필집 한 권을 내는 꿈을 꿔 본다.

그녀 덕분에 선물을 다시 읽는다. 솜털마저도 내게 신경 쓴 듯한 그런 선물을 받아 본 적 있던가. 대저 선물이란, 받는 사람을 온전히 생각하며 챙겨야 하는 것이다. 그녀처럼, 머리빗과 시곗줄을 선물한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속 부부처럼, 상대방을 위해 마음을 다한 선물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법이다.

볼펜향을 깊게 들이마신다. 곰팡이가 나무에 내는 길마저도 아름다운 무늬로 바라볼 찬찬한 더듬이가 난다. 그녀의 마음이 작은 숲으로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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