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부모님은 인복이 없다고 한탄하셨다. 아버지는 회사 사장이 돈을 다 빼돌리고 부도를 내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셨다. 엄마는 계주가 곗돈을 갖고 도망을 가는 바람에 돈을 뜯기기도 하고, 불쌍해서 거둔 동네 아줌마가 아버지에게 추파를 던지는 모습을 보시기도 했다.

반면에 나는 그 복을 내가 다 받나 싶을 정도로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입은 적이 없었다. 넉넉하게 오는 그 마음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는 일. 다른 그 무엇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은 사람에게 받은 위로가 컸기 때문이리라.

그러다가 되게 뒤통수를 맞았다. 내가 사람을 보는 눈이 그렇게 없었나 싶은 자괴감이 들다가 화가 나다가 나중에는 망가진 그 사람의 모습에 아팠다. 한때 마음을 준 사람이 한없이 초라하게 작아지는 데 뭐가 그리 즐겁겠는가.

이 책을 읽으며 내 인생의 장마를 견뎠다. 어쩌면 《그치지 않는 비》(오문세 글, 문학동네)라는 제목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이왕 맞는 비, 그야말로 왕창 젖어들고 말지라는 자포자기의 마음.

주인공은 형과 여행을 떠난다. 사실은 혼자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후 각자 자기의 방식으로 헤매던 중에 엄마가 교통사고로 죽는다. 하필이면 건널목에서 그를 발견하곤 뛰어오다가.. 괜찮다는 엄마의 마지막 말에도 불구하고 괜찮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형까지 자살하자 대책 없이 떠난 여행이다.

여행은 만남이다. 누군가는 알량한 돈을 훔쳐 달아나고 누군가는 노숙하는 그에게 편안한 잠자리와 푸근한 밥을 준다. 그는 쓰고 다니던 양산을 받기도 하고, 과거는 없던 일로 할 수 없으니 딛고 살아야 한다는 위로의 말을 듣는다.

어느 날 그는 지하철 개찰구에서 만난 광대에게 ‘오늘도 좋은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라는 글이 적힌 풍선을 받는다. 광대는 마치 스스로에게 거듭한 다짐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 주려고 하는 것처럼 절박한 몸짓이다.

이유를 묻는 그에게 광대가 건넨 말, “나는, 너에게 무언가를, 준 사람이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던 존재가 풍선을 건네는 행동으로 인해 특별한 의미가 되는 기적. 사람이 사람에게 의미가 되는 순간은 의외로 단순하고 보잘 것 없다.

저자는 여행 내내 그치지 않고 내리던 비도 언젠가는 그칠 것이며, 상처도 특별한 계기가 있어야 낫는 건 아니라고 한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이라고.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다. 그렇게 아프던 상처에 딱지가 앉더니 이젠 흔적도 희미하다.

아프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저마다 그런 상처를 안고 있기에 서로 보듬을 수 있는 것을. 말하지 않은 이야기는 독이 되어 몸속 깊숙이 자리 잡는다. 그걸 완전히 잊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붙잡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한다.

결국 사람이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 나는 이 책에서 평생 간직하고 싶은 내 인생의 문장을 찾았다. ‘사람이 사람에게 의미가 되는 순간, 나는 너에게 무언가를 준 사람이야.’

오늘도 수없이 많은 관계를 맺는다. 내숭이나 허세가 아닌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 다가가고 싶다. 최소한 상처를 주는 사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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