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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내 딸 정유리…너무 보고 싶습니다.”1991년 6학년 딸 원곡동에서 실종 후 28년 간 행방묘연
전단지 한 해 수만 장 배포…전국의 집장촌까지 찾아다녀
"유리야! 우리 빨리 만나서 남은 여생 행복하게 살자꾸나"
김석일 기자 | 승인 2019.06.05 12:26
▲단원구 선부2동 자택에서 정유리 양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여주면서 안타까움을 호소하는 정원식 씨(70세) 모습.

1991년 3월 26일, 대구직할시 달서구에 살던 다섯 명의 국민학교 학생이 도룡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선 뒤 실종됐다. 그 시절에는 대한민국 전체가 이 사건으로 들썩거렸다. 결국 사건 발생 11년 6개월만인 2002년 9월 26일에 아이들은 유골로 발견됐다.

그런데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된 바로 그 해, 안산시에서도 한 여학생이 원곡동에서 실종됐다. 실종 당시 그 여학생은 초등학교 6학년, 불과 13세였다. 아직까지도 행방을 알 수 없는 이 여학생은 현재 선부2동에 거주 중인 정원식 씨의 딸 정유리 양(실종 당시 13세, 현재 만39세)이다.

1991년 8월 5일 오후 7시 30분 전까지만 해도 아빠와 딸은 곧 다가올 생이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동생 집에 놀러 왔던 아빠 정원식 씨와 그의 맏딸인 정유리 학생은 이후 약 28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서로 얼굴을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이다.

“갑자기 놀이터에서 놀 던 동생 자녀들이 허겁지겁 달려 들어와 유리를 어떤 아저씨와 아줌마가 데려갔다는 거예요. 부리나케 놀이터로 달려갔죠. 그런데 흔적조차 없더라고요. 너무 황당해서 파출소로 곧장 달려가 이런 사실을 알렸습니다.”

유괴를 직감한 정씨는 다시 경찰서로 달려가 외곽도로을 차단하고 검문을 요청했다. 당시 경찰에게 신신당부한 그는 다시 집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유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안산에 온 지 2년 밖에 되지 않던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경찰서를 찾았다.

하지만 실종사건은 접수도 돼 있지 않았다. 다음 날 근무 중인 경찰조차 유괴사건을 듣지도 못했다는 것이었다. 순간 정씨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어처구니 없게 인수인계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분노에 찬 정씨는 당시 파출소 앞에 위치해 있던 지역방송을 들러 이런 사실을 자막으로 처리했고, 이를 본 경찰은 오히려 방송에 내보낸 것에 대해 정씨를 나무랐다고 한다.

“당시 경찰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그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현장에 있던 한 경찰관이 “별 것도 아닌 일로 신경 쓰게 만들고 있네”라며 실종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더군요.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개구리소년에게 온통 수사력이 집중돼 있을 시기였죠. 이후에 청와대 경호부서에 아는 지인이 있어 사연을 전했더니 바로 수사본부가 거주하던 건물 5층에 꾸려지더군요.” 하지만 돈을 요구하는 전화도, 유리를 데리고 있다는 전화도 한 통 걸려오지 않았다.

이후 정원식 씨는 전국에 유명한 집장촌까지 뒤지기 시작했다.

정 씨가 집장촌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한 것은 1991년~1993년 무렵이다. 그는 화물차 기사들이 전국을 떠돌며 다닌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래서 유리와 비슷한 또래를 봤다는 말만 들어도 집장촌으로 향했다. 딸을 찾아서 왔다는 그를 그냥 받아줄 리가 없기에 때로는 고객으로 가장도 했다.

“딸과 비슷한 또래의 여성들이 당시에는 ‘집장촌’에 가끔 있었어요. 고객이라고 거짓말을 한 뒤 사진을 보여주며 사연을 전하고 유리의 행방을 물었답니다. 매번 허탕이었지만 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청량리, 미아리, 논산, 군산, 인천 등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지요. 천호동에서는 포주들에게 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사실 정원식 씨는 일 때문에 안산에 살았지만 유리는 부여 시음초에 다니다가 그날 안산에 놀러온 상황이었다. ‘사실 안산에 놀러만 오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모든 게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 같아 제대로 된 일상생활이 어려웠다고 한다.

딸이 실종된 후 5년 간 돈벌이도 못한 그는 원래 다니던 회사에 복직했다. 당시엔 세상이 워낙 흉흉해서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도 간혹 있어 신고도 해봤다는 정씨. 그런 이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설마설마’ 하는 세월이 점점 길어지자 이후부턴 경찰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정원식 씨는 경찰서에 가지 않는다. 장기실종수사팀이 경기남부지방경찰청 내에 구성돼 있지만 현재 유리의 담당경찰관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때 실종 당시 경찰관들에게 너무 실망을 느껴서 그런지 내가 직접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서더라고요. 어쩌다 용기 내서 전화하면 퇴근했다거나 담당자가 자리에 없다는 답변만 들었습니다. 이젠 아빠인 내가 유리의 담당경찰관이 되기로 결심했죠.”

그를 실망시킨 공직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종 뒤 안산시청에서 직접 나서 전단지를 제작해 전해주기도 해 그때의 고마움도 가슴 한 구석에 담고 있다는 정원식 씨.

그는 2017년과 2018년 사람이 많이 다니는 전철역이나 어린이대공원 등지에서 한 해 전단지만 약 4만장을 돌렸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몸이 망가지는 것도 몰랐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그는 현재 허리와 다리까지 불편해져 전단지도 돌리지 못하고 있다. 그는 그런 자신을 탓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그를 보며 주변의 만류도 많았다고 한다.

“너무 긴 시간이 흘러서 그런지 일부 가족조차도 이제 놓아주자고 하더군요. 그런데 가슴이 놔주지를 않아요. 지금도 어디에 있는 것만 알면 세계 어디라도 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세월호 아이들의 이야기를 꺼내서 죄송하지만 유리의 생사라도 꼭 알았으면 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실종된 정유리 양을 찾는 실종전단지

한 번은 대구에서 유리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여성이 한 미용경연대회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수소문 끝에 DNA 검사까지 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특히, 올해 4월8일~15일까지 전국적으로 일제수색 기간 중 인천에서 수십 년 만에 실종자를 찾았다는 소식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는 정씨.

그런 일이 있을 때면 지금도 자다가도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운다. 낯선 이들에게 끌려갔을 딸을 생각하면 눈물밖에 안 나온다고 하소연했다. 아직 그의 스마트폰에는 어린 시절 딸의 사진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지난 5월25일은 ‘실종아동의 날’이다. 그는 장기실종 아동만 수사할 수 있는 전담인력이 크게 확대되길 소망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전했다.

정원식 씨는 지금도 사람들이 28년이나 지났다고 하면 “이제 28년 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집에서 머물고 있는 그는 몸이 하루 빨리 나아 전단지를 들도 밖으로 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유리야! 우리 빨리 만나서 행복하게 살자. 고생하지 않고 그저 살아있기만 해다오.”

이 말을 하면서도 정원식 씨는 아직 실낱같은 희망과 안타까움이 섞인 긴 숨을 몰아쉬었다.

김석일 기자  mo3m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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