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명의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자기의 명의를 갖는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어쩌면 평생을 버젓한 명의 한번 갖지보지 못해 한 숨을 쉬는 사람도 많은것 같다. 특히 부부간에는 명의를 일찌감치 아내 앞으로 해 놓고 사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뒤늦게 자신 앞으로 된 것이 하나도 없어 심한 허무감이 몰려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크든 적든 자신의 이름으로 된 것이있으면 거기에 왠지 모르게 차오르는뿌듯함도 있는 것 같다. 나이든 부부들의 사는 집에 대하여 명패부터 부부의이름을 둘 다 거는 집이 있는가 하면 주로 남편의 이름을 거는 집이 대부분인것 같다. 거기에다 명의마저 남편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부부의 경우에는 그마음의 표현을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경우가 많은 것 같다.

같이 살면서 명의가 누구 앞으로 되어있건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진짜 자신 앞으로 아무 것도되어있지 않고서는 그 마음을 알 수가없을 것이다. 살다보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그 서운함의 정도가 이런 부분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부부가 사는 집의 명의는 더욱 민감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 때 그 때를 대비하는 뜻한 느낌을 주는 부분도 있는것 같다. 살아가면서 넘어야 하는 크고작은 일들 앞에서 보다 당당하게 헤치고 나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면도 있
어 보인다. 반대로 남편 앞으로 모든 걸하는 가정 같은 경우에 당연히 그런 거아니야 하면서 편하게 잘 사는 집도 많은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왜 나는 나만 명의가 된 게 없지 하는 마음이 들었을 때는 그 마음을 무언가로 잡아주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강의를 하면서 노화과정에서 심
리적 변화에 우울감이 몰려 올 때도 이런 명의 부분이 작아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뭔가에 흥미와 기쁨과 만족감이 서서히 줄어져 가면서 자신을 채울무언가는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경제적 부를 누리면서도 물질적인 것으로도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란 원래 힘든건 어쩔 수 없는 일임에도 갑자기 하나씩 뚝 뚝 튀어나오는 한두 가지의 일들로 이미 마음이 저 만치 떨어져 있는뜻한 느낌에 조금은 위안이 되는 공동명의는 참 좋은 대안이라는 생각이 든
다. 부부간에도 서로 느끼고 생각하는면이 다르긴 해도 명의를 가지고 서로를 위한 방법을 찾는 것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상대를 위한 배려인 것 같다.
어느 가정은 가진 재산을 현금화해서 배우자 앞으로 했더니 동안 몰랐던 마음의 이런 저런 것을 새롭게 느낄 수있었다고 한다. 각자의 명의로 골고루나누는 것도 좋겠지만 같이 이름을 올
려 공동명의를 갖는 것도 살아가면서부부지간에 더 많은 배려와 공감과 애정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건강하고 힘들지 않을 때는 못 느꼈던 것에 대해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힘들어 질 때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명의 문제도 엄청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누군가는 느끼게 될 거라는 생
각이 든다.
좋은 아내 좋은 남편으로 살기 위해서로의 입장을 건강할 때 충분하게 좌우로 치우치지 않게 해놓는 방법도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내 거를 주장하기위한 방법은 아니다. 법적인 부분이긴 하지만 부부간에 냉정하게 이렇게 까지 해야겠냐는 부부도 있겠지만 명의를 갖는 건 다툼의 문제를
넘어 서로 간에 이름을 불러주는 표시라고 여겨주면 좋을 것 같다.
내가 왜 그 걸 그렇게 해줘야 되는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런 마음만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부간에 동등한 선을 넘어 보이는 게 필자만 그렇게 바라보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멋
진 부부로 가정을 이끌어 가기위해 아주 작은 것 같은 데도 이런 것에부터 양보하지 못하고 일방통행을 원한다면 공동명의는 이미 물 건너 간 일 같다.
그래도 꼭 명의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놓치지 말아야 될 것 같은 게 김남조 시인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이 구절이 이름과 공동명
의와 오버랩이 되는 건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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