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과 색채의 상승, 삶의 에너지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은 1872년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주(州) 외곽에 있는 아메르스

포르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교장인 아버지의 이름을이어받아 피터르 코르넬리스 몬드리안(Pieter Cornelius Mondriaan)이었으나, 파리에 정착한 후 스스로 피트 몬드리안으로 이름을 바꿨다.
초기 몬드리안의 작품에는 자연주의부터 상징주의,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점묘화법, 야수파, 표현주의 등 미술의 다양한 양식이 시도되었다. 그는상징주의를 접하면서 형상의 중심을
이루는 기본 틀을 간소화시키고 분할주의나 야수주의에서 사용되는 순색계열의 색채를 사용했다.
그는 또 엄격한 청교도 집안에서 자랐지만 동양의 신앙과 종교 철학을 연구하는 신지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관심은 그의 작품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몬드리안은 1911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첫 번째 ‘현대예술그룹’ 전시회에서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yPicasso)와 조르주 브라크(GeorgesBraque)의 입체파 회화를 접한 후 파리행을 결심했다. 40세 생일을 코앞에둔 1911년 말 파리로 이주한 몬드리안은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에서상당한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신지학에 대한관심을 증폭시켜 나갔다. 그는 영적 본질과 세계의 물리적 외형을 결합시키고자 꽃, 나무, 인간의 형체 등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다.
몬드리안은 1912년 이래로 화면 위의 검은 선들을 그리드 형태로 그렸다.
검은 선들은 사물을 바라보는 그만의독자적인 방식이 되었고, 그는 그물 조직과 같은 검은 선들을 통해 자연의 형태를 점차적으로 단순화시킴으로써 자신의 특징적인 스타일에 도달하게
되었다. 색채에 있어서도 회색과 갈색,검정색으로 한정하여 색채보다 드로잉에 중점을 두었다.
몬드리안은 엄격하고 기하학적이며추상적인 회화를 추구하는 자신의 시각을 ‘신조형주의’라고 불렀다. 그는 우주적 진실을 표현하기 원했고, 이를 위해 형식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환원하
고 선을 수평과 수직의 축으로 환원하며 색채를 삼원색과 흰색, 검은색, 회색으로 환원하는 가장 단순한 방식을 택했다. 그에게 수직선은 생기를, 수평선은 평온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두선들이 서로 적절한 각도에서 서로 교차하면 역동적인 평온함에 도달할 수있다고 믿었다.
몬드리안의 회화는 수학적 원리를바탕으로 한다. 그는 직각으로 교차되는 선과 흰색, 검정색, 회색의 무채색에대립되는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을농도와 명도가 일정하도록 채색함으
로써 이를 가시화했다. 1921년 몬드리안은 ‘구성’이라는 연작을 발표했다. 이 연작은 절정기에 이른 그의 예술 세계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커다란 빨강과 파랑의 색면이 전해주는 힘과 색채의상승 확장하는 움직임이 삶의 에너지를 느끼게 해준다.
색채의 움직임을 실험하면서 몬드리안은 중심이 비어 있는 구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힘의 발산을 암시하는 하얀색면은 1921년 이후로 자주 등장하는주제가 되었다.
통제된 우연성 속에서 선과 색의 다양한 변주를 보여준 몬드리안은 1920년부터 활동 마지막 순간까지 순수추상의 원칙을 충실하게 지켰다. 그는 1944년 2월 1일 뉴욕에서 폐렴으로 생
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는 《승리 부기우기 Victory Boogie-Woogie》가 있다.
아마도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기원하며 이름 붙인 듯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미완성으로남았다.
이듬해인 1945년에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유작 회고전이 열렸고 그의작품은 20세기 미술과 건축, 그래픽 디자인, 패션 등 예술계 전반에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다.
필자는 많은 벽화를 그렸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몬드리안 작품을 변형 시켜서 작업했고 시민들의 반응도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어 몯드리안를 다시한번 생각나게 하는 나의 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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