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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 짓는 일의 덧없음
반월신문 | 승인 2019.03.21 17:18

황영주의 책으로 들여다보는 세상

 

단정 짓는 일의 덧없음

 

 

어느 순간부터 나를 판단하기 위한 질문지가 앞에 놓이면 불편해졌다. 무슨 연구소 이름이 붙은 수십 개의 선택지도 풀어 봤고, 심지어 벗어놓는 신발 모양이 어떠냐는 질문에 대답도 했는데 결과는 늘 신통치 않았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은 건가.

뭔가를 이렇다 저렇다 단정 짓는 일이 그리 간단하거나 쉽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뿐인데 이런 테스트를 싫어하는 것도 성격이라니 그냥 웃을 수밖에.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고래》(천명관 글, 문학동네)는 그동안 쌓인 체증을 싹 가시게 했다.

이 책은 장르의 구분이 없는 게 특징이다. 초인적인 인물의 등장은 신화나 설화를 연상시킨다. 판소리의 유장한 가락과 신파극 변사가 들려주는 과장된 감정 분출과 이죽거림도 있다. 바닷가 결투 장면은 무협지나 성인만화를 보는 느낌도 준다. 자연의 법칙, 습관의 법칙 등 이런저런 법칙을 세는 것도 깨알 재미다.

한 마디로 소설에 대해 우리가 가져온 상식을 깬다고나 할까. 그러니 수상작을 심사하기 위해 모여 앉은 심사위원들이 당황할 밖에. 은희경 소설가는 “이 작가는 전통적 소설 학습이나 동시대의 소설작품에 빚진 게 별로 없는 듯하다. 따라서 인물 성격, 언어 조탁, 효과적인 복선, 기승전결 구성 등의 기존 틀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평했다.

그동안 나의 소설 읽기는 줄거리를 읽고 느끼면 끝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심사평과 수상작가 인터뷰, 수상 소감까지 33페이지를 꼼꼼히 챙겨 읽게 만들었다. 저자가 다양하고 다채로운 자양분을 흡수해서 자신만의 목소리로 만들어 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그는 자신의 몸 안에 한 세기를 살았던 할머니의 유전자와 지난 세기 위대했던 작가들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고 했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간을 가로지르며 생명을 연장해 가므로 소설을 쓴다는 건 지난 시대의 작가들과 다시 만나는 일일 뿐이란다.

비단 작가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거다. 수많은 시간이 켜켜이 쌓여서 나에게 이르렀으니 이 책의 줄거리가 허황된 남의 이야기라 할 수 없으리라. 다시 줄거리에 빠진다. 까마득한 옛날에 박복한 국밥집 노파가 천장에 어마어마한 돈을 숨기고 죽는데 그 돈을 찾아낸 사람이 금복이다. 그녀는 타고난 끼와 운으로 사내들과 세상을 희롱하지만 결국 그녀가 만든 대극장과 함께 덧없이 사라진다.

춘희는 금복의 딸로 욕망으로 범벅이 된 사람 속에서 유일하게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 그런 영혼을 온전히 알아보는 존재가 점보라는 코끼리뿐이라는 게 비극이다. 사람은 가도 흔적은 남는다던가. 그녀가 만든 벽돌로 인해 ‘붉은 벽돌의 여왕’으로 기억된다는 슬픈 마무리가 단숨에 안긴다.

처음 읽을 때는 놀라움과 재미, 두 번째 읽을 때는 춘희의 삶만 주섬주섬 담았다. 그녀가 그린 두 점의 그림, 어느 시인이 그 그림을 보고 남겼다는 시가 오래도록 아플 것 같다.

이 소설은 소설이 갈 수 있는 최대의 영역으로 갔다고 한다. 언젠가 다른 누군가가 그 다음 영역까지 닿았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리라. 나도 몇 마디 단어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끊임없이 물음표를 찍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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