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별

심명옥

 

길어야 석 달이라고 그랬다. 식사를 통 못하는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갔는데, 폐암 말기란다. 휘 찬바람이 가족들 사이를 돌아나갔다. 아버지 체력은 이미 바닥이었고, 30년 전에 병력이 있어 항암을 하면 바로 눈치 챌 게 뻔했다.

무겁게 가라앉는 공기를 엄마 목소리가 나직하게 흔들었다. “3년만 부탁했는데, 30년을 버텨 주셨으니 괜찮다. 그 어떤 것도 하지 말고 아버지가 나머지 날들을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만 해 드리자.” 엄마의 제안을 받아들여, 거실에 아버지 병실을 꾸몄다. 병상 침대를 임대했고, 지역 병원에 재가 서비스를 신청했다. 재가 서비스를 신청하니, 일주일에 두 번 간호사가 집으로 방문해서 아버지 상태를 살피고 필요한 영양제와 진통제를 주고 갔다. 엄마는 평생 해 온 새벽기도를 접고 24시간 아버지 옆을 지켰다. 우리들은 돌아가면서 두 분과 함께했다.

박꽃 닮은 밤을 잊지 못한다. 한밤중에 깨어났다가 두 분의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두 분이 마주보고 두 손을 꼭 잡고 잠든 모습이 지슬라브 백신스키의 ‘화석연인’을 닮아 있었다. 순간, 내 귀에 사금파리 주워 모아 소꿉장난하는 소년소녀의 맑은 목소리가 요란했다. 한때는 마냥 푸르렀던 두 분이 등껍질로 남아 이별 앞에서 애틋해 하는 몸짓이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이야기꽃이 무성하게 피어났던 밤은 위로였다. 누워 있던 아버지가 한사코 옷을 제대로 입혀 달라더니, 소파로 내려앉아 "꺼드럭거리던 그땐 참 좋았지." 하며 오래 된 추억을 꺼내 놓았다. 병든 아버지가 무용담 속에서 싱싱하게 되살아났다. 든든한 선임의 백 믿고 으름장 놓던 모습이며, 통신병 시절 정리한 선을 야매로 팔아먹던 일들이며, 눈앞에 위기가 오면 거짓말을 했던 추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평생에 가장 긴 이야기를 하는 아버지 손을 꼭 잡고 있던 봄밤이다.

아버지다우면서도 아버지답지 않았던 마지막 고도리를 치던 날이 선명하다. 이길 것 같으면 스톱을 외쳐 판돈을 지켜내던 아버지가 그날은 남이 점수가 나든 말든 무조건 고를 외쳤다. 게다가 평소라면 밤새 쳤을 고도리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몸의 물기가 빠져나가는지, 아버지 손에서 자꾸 화투장이 미끄러져 내렸다. 애써 모른 척했지만 아버지 스스로도 당황했던지 서둘러 판을 접었다.

시득부득 말라가는 몸에 예감한 것처럼 아버지는 평생 하지 않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알뜰하게 모아 두었던 돈을 사업 자금으로 번번이 넘겨주면서도 한마디 말씀 없던 분이, 오빠에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고 일침을 놓았다. 통증에서 놓여날 때마다 엄마에겐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 예뻐. 많이 먹어. 무조건 많이 먹어.”라고 당부했다. 무뚝뚝한 양반이 내게 많이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서서히 사위어갔다.

생각보다 봄밤은 짧았다. 모두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아버지는 훠이훠이 떠났지만 남아 있는 나머지 계절의 밤이 길다. 마약성 진통제가 더 이상 효과가 없어 병원에 모시기까지, 한 달 반 동안 거실 병상에서 피어난 꽃 덕분에 아버지를 기억할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배운 바 없어 평생 스스로를 무식하다 생각한 아버지는 오래 살아남는 법을 알았다.

물론 우스갯소리다. 아버지가 의도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아버지와의 아름다운 이별을 겪고 나서 죽음도 삶과 똑같이 배워야 함을 느꼈다. 극한의 고통에서 일상을 살아내는 법은, 소중한 사람이나 세상과 이별하는 법은 절로 터득되지는 않는다. 마무리하는 소중한 순간을 허둥대며 흘려버릴 수는 없다. 새 생명이 오는 축복의 순간이 있는 것처럼 한 사람의 생이 지는 데에도 꽃 같은 순간이 있다. 한 사람의 서사는 죽음으로 완성된다.

연연하기보다는 피안의 세계로 존엄하게 걸어가신 아버지. 너머 세상으로 가면서까지 위안을 주고 간 아버지를 사랑한다. 나는 내 아버지를 오래도록 기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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