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주의 책으로 들여다보는 세상

 

내가 풍경이고 풍경이 나일 때

 

뭐든 찬찬히 들여다보지 않고 건성으로 보는 내게 《자전거 여행》(김훈 글, 문학동네)은 놀라움과 부러움이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사랑의 첫 단계는 그 대상을 눈여겨보는데서 시작한다는데 그동안 사랑을 한 거는 맞나.

밑줄을 빡빡 그어가면서 글쓴이가 이 땅과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엿보았다. 상대를 모르는 상태에서 마음이 건너갈 수는 없는 일, 그는 풍경 그 자체였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는 말이 영 허튼 소리가 아니었던 거다.

이 책에는 화려한 미사여구도 없고 개인의 의견도 없다. 단지 “나는 사실만을 가지런하게 챙기는 문장이 마음에 듭니다.”라고 말하던 글쓴이의 철학이 담겼을 뿐이다. 단순히 풍경만을 말하는데 그 속에 정신없이 빠져드니... 우리 땅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중략)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내 삶에 산수유는 없었다. 그저 봄이면 지천으로 피는 꽃 중의 하나. 그 생김새도 희미했다. 그런데 이 문장들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나는 어느덧 선암사 뒷산에 서있었다. 향일암 앞바다의 동백숲은 또 어떤가.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후략)」

여수 앞바다에서 그의 언어로 동백꽃을 만났다. 동백꽃은 정말 절정에서 추락해버려서 그 죽음이 얼마나 무겁던지. 그의 문장 속에서 길과 풍경과 우리네 삶의 모습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는 것처럼 나도 나만의 언어로 내 삶과 풍경을 녹여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가 풍경만 담은 이유는 뭘까. 그는 풍경은 사물로서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본래 스스로 그러하다고. 아름답지도 추악하지도 않고, 쓸쓸하거나 화사하지도 않으며 자유나 억압은 더더욱 아니라고. 인간을 향해 아무런 말도 걸어오지 않으며 그저 시간과 공간 속으로 펼쳐져 있을 뿐이라고.

나는 이 말을 누구나 그 풍경 속에 끼어들 틈이 많다는 걸로 이해했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내가 풍경으로 뛰어들어 나만의 풍경을 만들 수 있다니. 세상을 슬렁슬렁 대하면 그 삶은 감탄사가 사라진 삶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마음으로 쓴 시가 「이팝꽃」이다. 봄이면 호수공원에 그야말로 흐드러지게 핀 꽃. 매일 아침 산책을 하면서 말을 건네고 만지고 빛을 즐겼다. 그 꽃을 보면 떠오르는 이름을 사랑했다. 암튼 푹 빠지면 뭐가 되거나 나오는 게 순리다.

자잘한 그대의 빛에 / 나를 잃었습니다 / 뭐든 줄 때는 / 아쉬움 없이, 낱낱이 꽉 채운 / 그 사랑을 / 차마 셀 수 없네요 / 기왕 사랑할 거면, / 어차피 줄 거면 / 눈과 귀와 마음이 / 쏠리는 대로 정말 그렇게 / (이팝꽃, 황영주)

 

황영주 수필가

 

저작권자 © 반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