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36년 동안이나 일제 치하에서 시달림을 받고 있던 우리 선조님들은 구국을 위한 민중의 자발적행동으로 분연히 일어났던 1919년(당시 인구 약 1700만) 3·1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서 1945년 8월 광복이 되기까지 일제지배를 벗어나 우리의 주권을 되찾는 기회를 맞이하였으나, 그로부터 100주년을 맞이하는 저희 후손들은 무엇인지는 몰라도 마음 한 구석에 우리는 무엇을 하였나? 라는 자성을 하여본다.

필자는 1940년 생으로 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홍순칠(1877년∼1932년,고종 14)의 친손녀이다. 지금의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수암면 와리 482번지)에서 태어났다. 조부님의 공적기념비는 현재 안산시 단원구 와동체육공원에 자비로 세워져 있다.

어릴적부터 늘 들어오던 조부님의 이야기는, 사랑방에서 태극기 3000개를 한달동안 그릴 때 사람들의 많은 왕래가 있었고 할머님의 음식솜씨가 너무 좋아 스님이나 나라지사님도 동치미를 싸가지고 갔다는 이야기...그리고 안산의 대지주였다는 이야기 등이다. 한달 동안 수암면 와리에서 독립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여 태극기를 제작 주민을 규합하는 거국적 행사를 위하여 3월29일 18개 동리에 격문을 돌리며 다음날 아침에 ‘조선독립만세운동’에 꼭 참여하여 주기를 당부하여 다음날인 3월 30일 비립동에 집결하기로 하였는데 주민과 소작인들에게 통고한 결과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였고 모인 군중을 조부님께서 일일이 점검하였다는 내용의 판결기록문이다.

조부님은 윤병소(尹秉昭)·윤동욱(尹東旭)·유익수(柳益秀)·김병권(金秉權)·이봉문(李奉文) 등에게 대형태극기를 나누어주며 앞장설 것을 권유하여 함께 대열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주재소, 면사무소, 보통학교와 공자묘를 돌면서 시위를 하였다는 내용이다.

아버님 6세 때 왜경에게 짓밟히며 끌려가시는 모습을 보고 할머님은 그 자리에 쓰러져 실신하여 그길로 자리에 눕게 되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전하여 들었다.

요즈음 전해들은 소식으로는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가기 전 만세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 13인이 수암 주재소에서 일본수경들에게 무지막지하게 매를 맞아 고문을 당하여 그 울부짖음이 바깥에까지 들렸다는 현지주민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가슴이 미여진다. 같은 해 5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소요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르셨는데, 당시 거주 지역인 와리(瓦里)[지금의 안산시 단원구 와동]의 농민들에게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된다.”라며 농민들을 설득하여 참여하도록 하였다고 진술하셨다는 내용인데, 지금 생각하니 소작인들에 대한 자비의 행을 하신 것으로 생각이 든다. 독립이 이루어지면 토지 분배로 인한 독립국가 건설을 이룰 수 있고 공동체의 삶을 생각하신 것 같다.듣자하니 당시 전체인구 약1700만 중에서 3·1독립만세 운동하던 사망자수가 1차, 2차,7500명 부상18,000명 약 300만명이 되고, 붙들려 간 사람이 5만명, 옥고를 치르다 돌아가신 분들이 더 많아 통계를 낼 수 없다는 소식이고, 순국선열님들의 파악이 안되어 지금도 서대문형무소에 위패가 놓을 자리가 없을정도로 겹겹이 쌓여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 과연 우리는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며 고개나 들 수 있는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에 이 글을 적어본다.

3·1절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 마침 3·1 정신을 계승하기위한 일환으로 안산시에서는 수암에 애국지사님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기념탑을 세운다하니 후손된 도리로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듣기로는 군자초등하교와 반월장터와 대부동사무소에도 기념탑은 세워졌으나 수암에만 없으니 애국지사선열님들의 애국애족의 뜻이 헛 되이지 않게 하기위한 발자취가 되었으면 한다.

 

1992년에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2019년 2월 12일 (화) (사)단군朝鮮연구회 이사장 홍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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