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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의 계절
반월신문 | 승인 2019.01.30 09:59

앞날의 행운을 빌어 주며 내게 노란 장미를 건네던 그의 눈길을 잊지 못한다. 좋아하면서도 헤어짐을 선택했던 내 마음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덜컥거리는 관계에 안녕을 고하면서도 끝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성숙해지면 그에게 돌아가자.’

사랑하는 데도 연습이 필요했던지 여러모로 힘든 게 많았다. 현실의 사랑은 결코 책이나 영화에서 접한 사랑과 닮은꼴이 아니었다. 내가 주는 사랑은 이만큼인데, 왜 건너오는 사랑은 작은지 헤아리기 바빴다. 풋사랑을 완성하기에는 더없이 부족한 마음 상태였다.

4학년이라 취업에 대한 부담감도 이별에 한몫했다. 친구들이 하나둘 취직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불안감이 점점 커갔다. 졸업이 코앞인데, 다음 자리를 마련하지 못해 작아지는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기 싫었다. 똑같이 졸업을 앞두고 있었기에, 내가 바로 서야 상대를 볼 수 있겠다는 판단은 그에게도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곰곰이 되짚어 보니, 온통 내 탓인 것만 같았다. 겨울이 있어야 꽃이 피는 법을 그 때는 몰랐다. 먼 데서 그저 활짝 핀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땅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시간은 못 보고, 핀 꽃만을 볼 줄 알았으니, 관계가 엇나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뒤늦게 저마다 피움을 위해서는 노력을 기울이고 기다려야 함을 알았다. 한참을 비워내고 또 비워냈다.

비워내고서야 비로소 단단해졌다. 두 계절을 건너뛰어 종로서적 앞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그와 지금껏 가정을 일구고 있는 힘은 그 때 얻은 건 아닐까. 만약 헤어져 있던 시간이 없었다면 우린 어땠을까. 삐걱거리던 관계를 붙잡고 있다 완전히 헤어지진 않았을까. 가끔 추억 속에서 그를 꺼내보며 성숙하지 못했던 내 사랑법을 탓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방법은 어렵기만 하다. 스물넷, 사랑에 어설퍼 떠났던 것처럼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상황도 상당히 낯설다. 지난 1년, 게으른 성정이 감당하기에는 내가 맡았던 일이 버거웠다. 느긋하게 바라보고 천천히 일하는 것을 즐기고, 슬쩍 옆길로 새는 것도 좋아하는 내가 감당하기에는 힘든 자리에 있었다. 숫자를 갖고 씨름하다 보니, 글을 쓸 시간을 만드는 데도 쫓겨야 했다.

낯선 세계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작아졌다. 말이 부풀려지고, 정성을 쏟은 일이 뜻밖의 결과를 가져 오는 데 주저앉았다. 정신없이 1년을 보내고 나니 문득 두려워졌다. 다시 1년을 그렇게 보내다가는 스스로를 추슬러 올리기는 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작아진 나를 붙잡고 다른 사람을 향해 웃을 수는 없다. 여물지 못한 사랑도 내려놓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가만히 멈춰 설 순간이 필요했다. 체증처럼 쌓이는 어려움을 놓고 무조건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훌훌 털어버린다. 지나간 순간이 다 나쁘지는 않았다 해도 떠나야 할 순간임을 직감한다. 어쩔 수 없이 놓은 것은 내게도, 남아 있는 사람에게도 상처가 됨을 안다. 그럼에도 어려운 선택을 하는 건 돌아올 길을 찾기 위해서다. 이대로 가다간 영영 길을 잃을 것 같기에 이기적인 선택을 한다. 놓았다가 다시 잡은 관계는 돈독했고,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법을 절로 터득하게 했다. 떠나 있는 시간은 끝이 아니다.

지금의 이 시간 또한 훗날 돌이켜보면 그냥 웃고 넘길 일이 될지 모른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피하는 건 나이 들었다는 증거라는데, 그 예여도 좋다. 아주 오래 전의 겨울처럼 나는 다시 돌아가기 위해 지금 이별을 선택한다.

성숙의 계절로 들어선다. 머지않아 올 봄처럼 나도 다시 씨앗을 심고 꽃을 피워 올릴 준비를 한다.

수필가 심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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