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수록 신기한 그림이다. 조금은 무성의해 보이는 작품인데도 볼 때마다 매력이 넘친다. 전시회에서 목정 방의걸의 ‘그날에’(37×34.0)를 처음 만났을 때의 강한 끌림의 여운이 아직 있는 듯하다. 작품 앞에 자주 서 있는 걸 보면.

화폭의 주인공이라곤 구부정한 노인과 경쾌해 보이는 강아지뿐이다. 분명 표현하고자 하는 중심일 텐데, 그들은 중앙이 아닌 오른쪽 상단부에 있다. 과장 조금 보태면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도드라지게 표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붓질도 설렁거리며 한 듯, 그림에는 여백이 참 많다. 동양화에서 중요하다는 여백의 미를 목정은 거칠게 다룬다. 대부분의 산수화나 조충화, 화조도 등에서는 여백을 철저히 계산해 둔다. 이에 반해 ‘그날에’서는 바람이 나무의 결을 만지고 가는 것같이 붓이 지나간 대로 길이 생기고 그만큼의 여백이 생긴다.

붓질 별로 안 간 듯 보이지만 화폭 가득 설원이다. 작품에서 여백으로 보이는 곳은 다 눈이다. 며칠 새 눈이 꽤 많이 온 모양이다. 눈길에 헤맬 텐데도 노인은 길을 나섰다. 앞섶이 불룩한 걸 보면 누군가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러 가나 보다. 부인의 심부름이라면, 구운 고구마일 수도, 맛있게 익은 김치일 수도 있겠다.

강아지와 노인은 친밀해 보인다. 평소 사이가 좋아 주인이 가는 길에 졸래졸래 따라 나온 게 분명하다. 노인은 못 이기는 척 데리고 나왔지만 사실 혼자였으면 저 길이 꽤나 심심했겠다. 강아지 한 마리 그려 넣은 목정의 마음이 따뜻하다. 귀를 쫑긋 세우고 주인을 돌아보는 강아지는 기분이 한껏 들떠 있다.

숨어 있는 표현법은 기발하다. 서양화를 전공하다 동양화에 흥미를 느껴 전향해서 그런지 목정은 그림에 슬쩍 원근법을 끼워 넣었다. 낙관을 기준으로 하면 노인과 강아지는 더 멀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치 있는 표현력이다. 더구나 중심인물을 따라 하염없이 걷다 보면 공간이 자연스레 그림 밖으로까지 확장된다. 저 먼 곳에서부터 이곳까지 걸어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 또한 단숨에 설원으로 달려가 동행하느라 발이 시리다.

작품 곳곳에서는 시공에 따라 다른 서정과 이야기가 피어난다. 처음 그림을 봤을 때는 서정적인 분위기에 한껏 취했다면, 지금은 이야기를 떠올리는 재미가 크다. 할미꽃 전설이나 어린 시절 엄마 무릎 베고 누워 듣던 아리랑 서정에 취해 있던 마음이, 세월이 지나니 심부름 가는 서사를 꿰어내며 즐거워한다. 그림도 그대로요, 읽는 이도 변함이 없는데 마음 상태에 따라 그림이 달리 보인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날에’에 강하게 끌린 이유는 뭘까. 그림을 보고 있는 동안 위안을 받았다는 느낌이 확실하다. 그림이 작아서 품고 싶은 욕심을 낼 수 있다는 것도 끌림의 요소일 수는 있다. 전시장을 벗어나도 계속 생각나서 안양에 있는 목정 선생님을 뵈러 갔더니 대뜸 질문을 하셨다. “왜 이 작품이 맘에 들었어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드릴 수는 없었지만, 이 그림에는 확실히 내 시선을 붙잡는 뭔가가 있다. 어린 시절, 들어도 다시 듣고 싶던 옛날이야기처럼.

삶을 달관한 화가는 기억 속 어딘가에서 소중한 하루를 꺼내와 ‘그날에’라는 화폭에 담았다. 그림에 반한 사람은 그 앞에 서서 시시때때로 다르게 보이는 그림을 읽느라 즐겁다. ‘그날에’는 특별한 그림이다. 어떤 날은 너무 단순해 보여 읽을 게 하나도 없다가, 어떤 날은 화폭 가득 이야기가 담긴 것 같아 한참을 서 있게 만든다.

‘그날에‘는 지금껏 내가 산 유일한 그림이다. 사는 내내 ‘그날에’ 앞에 서는 날은 자주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그림이 들려줄 이야기가 궁금하다. 오늘도 나는 그림 앞에 선다.

심명옥 안산문인협회 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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