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표현 불능증, 다른 말로 알렉시티미아. ‘냉혈한’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정서적 장애다. 《아몬드》(손원평 글, 창비)의 주인공 윤재는 편도체의 크기가 작은 데다 뇌 변연계와 전두엽 사이의 접촉이 원활하지 않아 어릴 때부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멀쩡하다고 생각했던 자식이 무서운 얘기를 참 태연히도 말한다고, 친구가 다쳤는데 괜찮냐고 물어볼 줄도 모른다고 비난을 받는다면 그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더구나 그 병의 설명이 낯선데다 영 고칠 수 없다면.

오랜 시간 연을 끊고 살았던 친정 엄마를 찾아가는 딸의 시름은 깊고 암울하다. 그런데 친정 엄마는 혼자 아등바등 살다가 결국 손을 내민 딸의 버거운 짐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네 엄마 말이 사실이라면, 넌 괴물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괴물, 그게 너로구나!" 손자에게 건넨 말, 그거면 충분하다.

괴물을 사람으로 바꾸려는 두 사람의 노력은 헌신적이다. 온갖 종류의 아몬드를 먹이고 상황과 감정을 연결시키는 문장을 온 집안에 붙인다. 직업도 헌책방 주인으로 바꿨다. 보통 사람이라면 본능으로 아는 아프고 기쁘고 슬픈 감정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아이는 아이대로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다. 괴물은 괴물일 뿐, 그 너머를 보지 않으려는 또래 속에서 홀로 맞서야 하는 학교생활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여기서 끝이 아닌 게 묻지마 살인으로 할머니가 죽고 엄마는 의식을 잃는다. 이 모든 일에 그저 담담한 윤재를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미어진다. 이 비극의 끝은 어디인지.

여기서 글쓴이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도, 괴물로 만드는 것도 사랑이라는 말을 꺼낸다. 좀 식상하겠지만 그런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며 책방에 틀어박힌 윤재에게 친구 둘을 보낸다. 마치 할머니와 엄마가 보낸 선물처럼.

과연 윤재는 달라지려나. 여우비에 옷이 젖듯 그의 마음에도 조금씩 틈이 생긴다. 그 틈으로 꽃과 향기, 바람이 드나들고 꿈이 자리를 잡는다. 그러더니 마침내 사랑의 감정이 싹 튼다. ‘작은 벌레들이 몸을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간질간질해.’

그렇게 달라진 윤재가 묻는다. 너무 멀리 있는 불행은 내 불행이 아니라서 외면한다고 치자.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나서지 않는 건 뭐냐. 느껴도 행동하지 않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는, 그건 진짜가 아니라고.

친구를 위해 기꺼이 폭력에 맞서는 윤재와 손자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 할머니는 닮았다. 사랑이란 그런 거다. 머리가 시키기 전에 몸과 마음이 먼저 반응하는 것, 내가 대신 아프고 힘들어서 다행이라고 여기는 그런 고운 마음이.

영화보다 강렬하다, 드라마처럼 팽팽하다, 무조건 재미있다고 한다. 실제로 사회학, 철학을 공부하고 영화 연출을 전공한 글쓴이의 이력이 마음껏 펼쳐져 있다. 맘껏 허우적대다 표지의 윤재 눈빛을 들고 나온다. 그 눈빛으로 좋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살고 싶어서.

지켜준다, 귀히 여긴다는 감정을 아낌없이 쓰며 살겠다. 어쩌다 나를 그리 봐주는 이름을 만난다면 남은 날을 살기에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황영주 안산문인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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