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이 야구 경기를 보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런데 아버지가 운전하던 차의 시동이 기차 선로 위에서 갑자기 꺼졌다. 달려오는 기차를 보며 아버지는 시동을 걸려고 황급히 자동차 키를 돌렸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기차는 차를 그대로 들이받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아들은 크게 다쳐 응급실로 옮겨졌다. 수술을 하기 위해 급히 달려온 외과 의사가 차트를 보더니 “난 이 응급환자를 수술할 수 없어. 얘는 내 아들이야!”라며 절규하는 것이 아닌가?」

이게 뭐지, 문맥이 맞지 않네. 어떻게 죽은 아버지가 차트를 본다는 건가. 다른 사람들은 의사가 친아버지이고, 야구장에 같이 간 아버지는 양아버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라도 했다는데 나는 그냥 이상했다. 그러다 그 의사가 아들의 ‘엄마’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읽어보라는 글쓴이의 설명에 번개를 맞은 것처럼 눈이 뜨였다.

《프레임》(최인철 글, 21세기북스)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을 보여주고 그 마음의 한계를 스스로 깨닫는데 도움을 주는 심리학 책이다. 글쓴이는 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삼거나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여러 연구 결과를 “이건 몰랐지?”하는 양 풀어 놓고 그걸 먹고 마시는 우리를 즐겁게 지켜볼 뿐이다.

예를 들어 음식을 적게 먹고 싶다면 모든 그릇의 크기를 반으로 줄이면 된다. 그릇의 크기가 음식의 섭취량을 결정하는 프레임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제시되는 양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평균적인 양’이라고 해석하곤 한다. 그래서 그릇이 큰 경우에는 남기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그릇이 작은 경우 더 먹게 되면 ‘너무 많이 먹는 것 아닌가’하는 불안감을 경험한다. 아무도 이런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데도!

물론 “그렇구나!” 혹은 “내가 그랬네.”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마음이 썩 좋지는 않다. 정치인들이 선거 공약이나 슬로건에 그렇게 예민하게 굴었던 이유를 알고 나니 뒷맛이 씁쓸하고 각종 질문지가 그냥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게 소름이 돋는다. 게다가 내가 그런 것들에 덤벙덤벙 반응을 보였다는 것도 실망스럽고.

그런데 글쓴이는 “나는 세상을 강자와 약자, 성공과 실패로 나누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배우는 자와 배우지 않는 자로 나눈다.”는 사회학자 벤저민 바버의 말로 내 처진 어깨를 다독인다. 지혜란 자신이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를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한다는 말도 곁들인다.

나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맥락을 보려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을 리 없다. 소유를 위한 구매와 경험을 위한 구매의 차이를 알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관계의 경험에 집중하자는 마음을 먹지도 않았을 거다. 글쓴이의 소망이 언젠가 마음에 쏙 드는 개정판 《프레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데 나도 그동안 많이 배우고 닦아서 깊이 있는 눈빛으로 그와 내 앞의 세상을 마주보고 싶다.

황영주 안산문인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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