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일제 강점기로부터 6.25동란에 이르기까지 무려 4대에 걸쳐 순국한 가문이 방송망을 타고 소개 되어 뭉클했다. 이남규-이춘구-이승복-이장원으로 이어지는 가문으로, 4대가 모두 목숨 걸고 국난 극복 대열에 앞장서 오다가 숭고하게 생을 마감하고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다고 한다.

수당 이남규 선생은 구한말 나라의 중책을 맡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대 4대문장가로서 학덕과 충절을 겸비한 분이다. 당시 통령비서실장격인 승정원 최고책임자로 봉직 하던중, 내정간섭과 명성황후 시해를 감행하는 등 일제 침략이 본격화되자, 그들의 간교한 술책을 규탄하는 항일 상소를 잇따라 고종에게 올렸다.

일제의 만행을 세계만방에 알려 국모의 원수를 갚고 동맹국과 함께 일제를 처단하자는 주장을 강력히 펼쳐 요주의要注意 대상 인물로 낙인 찍혔으나, 끝까지 지조와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아들 이춘구는 부친 이남규 선생을 도와 의병 활동에 참여했다. 거듭되는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자 일본 헌병은 마침내 부친을 군도軍刀로 내리쳤고 이에 저항 하다가 급기야 아버지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선생의 손자 이승복은 종로경찰서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것을 비롯하여 평생 항일 의병운동에 앞장 섰다. 항일단체인 신간회 창단 핵심 멤버로 활약 하는 가운데 여러차례 고문과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에서 중요 역할을 담당 하다가 마침내 순직 했다.

선생의 증손자 이장원은 6.25동란을 맞아 20대 초반에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여, 원산항 동쪽의 ‘황토도’ 방어작전 소대장 직책을 보임 받았다. 황토도는 전략 요충지로서 북한이 이섬을 장악 하려고 호시탐탐 기습공격을 감행해 왔다. 후방 지원을 받을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임에도 10여명의 병사가 무려 150여명의 북한군과 일사각오로 대치 하였다. 최후의 일각까지 필사적으로 진지를 사수하다가 이장원은 장렬하게 산화 했다.

4대에 걸친 순국 가문의 발자취를 제한된 지면에 요약해 보았다. 이 분들의 숭고한 애국정신 이야말로 깊이 새기고 계승 해야할 고귀한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평탄한 삶을 누릴수 있었음에도 일신의 영달과 안위를 뒤로하고 국난 극복의 선봉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목숨까지 바쳐 나라를 사랑할수 있다면 이는 애국의 완결판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국난의 고비마다 분연히 일어나 4대에 걸쳐 위국 충절을 계승해 온 순국殉國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는 자자손손 귀감이 될 것이다. 충남 예산에 소재 하고 있는 이수남 선생의 고택과, 4대가 함께 안장돼 있는 국립현충원 묘역을 한 번 둘러 보려고 한다. 심심한 경의를 표하고 싶다.

임종호 안산문인협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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