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일 반월신문이 1990년 11월 1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28년이 되는 날이다. 사람으로 치면 두려움도 부족함도 없이 용기백배 호랑이도 사자도 두렵지 않는 때다. 그런 때를 맞은 언론기관으로 비록 인구 100만 미만의 지역민을 대상으로 하는 언론지이지만 정의사회구현을 위해 정론지로서 국내 최고가 되기를 지대하면서 축하한다.

일국의 흥망성쇠가 유능한 지도자에 있듯이 한 지역의 발전 그 중심에 언론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 명심해야 한다. 언론지로서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위치에 있다는 긍지를 갖고 보다 발전 시민의 지팡이가 되어 줄 것을 믿는다. 시민은 그 점에 귀 기울인다.

일제 조선총독부로서는 소식 전파도 전파지만 정론이라는 것 때문에 식민통치 초기에 신문잡지 발행을 금지 출판시설을 폐쇄했다. 그것도 불구하고 3·1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모여 조선독립신문 등 30여개 지하신문을 발행했다. 우리나라 언론지로서 신문이 그렇게 시작됐다.

우리나라 역사상 기억되고 있는 언론지하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있다. 그들은 일제식민통치기간인 1920년 3월 6일 조선일보가 동년 4월 1일 동아일보가 창간됐다. 당시 일제는 일본제국주의식민통치에 반하지 않는 내용만을 담아 발행하는 것은 물론 발행 전에 검열을 받는 조건을 붙여 설립허가를 했다.

창간 후 조선일보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고 언론독립투쟁을 펼쳤다. 그 때문에 발행배포금지 23회 행정조치와 무기정간 4회 압수 등 414회에 걸쳐 탄압을 받았으며 동아일보 또한 창간 15일 만에 평양에서 일어난 3·1운동 1주기 기념 독립만세시위를 보도 그 때문에 발매 배포금지처분을 받았다. 그런 처분에도 불구하고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 만주에서 일어난 독립군무장운동 등을 소상히 보도하는 등 허가 시 금지 조건을 지키지 않았다. 때문에 1920년 9월 25일 등 4회 무기정간, 압수 489회 결국 1940년 8월 10일 폐간처분 됐다. 그와 같이 신문에 대해 압수 정간 폐간 언론인체포 투옥 등이 계속됐다. 그러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탄압에 굴하지 않고 언론을 통한 독립투쟁을 계속했다.

1925년 4월 15일부터 17일까지 3일간 잡지 신문기자 700명이 서울에 모여 ‘죽어가는 조선을 붓으로 구해보자’ 라며 전 조선기자대회를 열었다. 그토록 일제탄압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는 6·10만세사건을 호외로 발행 살포했으며 조선일보는 비평 란 ‘8면봉’을 통해 만세사건관련 애국투사들의 재판진행 등을 신속하게 보도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에 앞장섰다. 그러자 조선총독부가 통제를 강화했다.

또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그 사실보도를 하지 못하게 지시했다. 보도 금지와 상관없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비롯한 민족지들은 계속보도를 했다.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올림픽경기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선수 가슴에 단 일장기를 지운사진을 조선일보 유해붕기자와 동아일보 이길용 백운선 강대석 기자가 보도했다. 일제가 그 보도를 빌미로 무기한 정간조치를 하고 기자들을 체포했다. 그 후 결국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됐다. 일제 36년 식민통치기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그 외 민족지들은 일제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지로서 신속 정확한 보도는 말할 것 없이 탄압에도 불구하고 정론지로서 사명을 다했다. 그게 언론의 긍지이자 의무이다. 요즘 언론은 언론의 자유를 법으로 보장받고 있다 그런데도 정론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혹자는 언론사를 어용이니 정부기관지 그렇게 호도하고 있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국민이 보다 자유롭게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신속 정확한 보도는 물론 정론지로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반월신문이 비록 지역지이기는 해도 안산이라는 지역을 탈피 전 국민의 귀로 입으로 밝은 사회구현에 앞장 서 주기를 바란다. 창간 28주년을 거듭 축하한다.

문학평론가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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