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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기억에도 찔린다
반월신문 | 승인 2018.11.07 10:04

눈을 씻고 다시 볼 수밖에 없다. 사진 속 그녀는 내 기억 속 아이와 너무도 다르다. 황소개구리를 닮아 있을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날씬하고 어여쁜 모습으로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다. 초등학교 때 뚱뚱하고 심술궂었던 모습을 뜰채로 걷어내듯 싹 없앤 그녀를 보는데, 반가움보다는 복잡한 생각이 든다.

Y양은 허구한 날 나를 괴롭혔다. 내가 다니던 시골 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적어 한 학년이 80여명 안팎이었다. 1학년 때 정해진 반이 졸업할 때까지 변동이 없었는데, Y양은 반에서 내로라하는 센 애였다. 덩치가 크고, 싸움을 잘했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에 나오는 엄석대를 그대로 닮아, 선생님 없는 세계에서 작은 왕처럼 군림했다. 놀이편도 자기가 짰고, 그 애 한마디면 뭐든지 다 들어주어야 했다. 누구도 Y양에게 함부로 굴 순 없었다. 새 학기가 될 때마다 아이들은 Y양과 짝이 되고 싶지 않아 키순으로 설 때 그 애의 앞뒤에 서려 하지 않았다.

나 역시 Y양과 먼 거리에 있는 게 편했다. 짝꿍이 되지 않았으면 했지만, 6학년이 되었을 때는 더 이상 피해 갈 수 없었다. Y양은 짝꿍이 된 나를 심부름꾼 다루듯 했다. 점심시간이면 물을 떠오게 했고, 자기가 청소당번이면 대신 청소를 시켰다. 단골메뉴가 어디 이뿐이었으랴. 받아쓰기 훔쳐보기, 숙제 베끼기를 묵인하게 했고, 시험 답지까지 보여 달라고 협박을 했다.

Y양 때문에 학교 다니는 게 싫었다. 조용하니까 점점 요구하는 게 많아졌다. 겁이 나서 Y양의 불공평한 요구들을 들어 주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이 싫었다. 작은 복수를 했다. 받아쓰기를 보여 준다고 해 놓고 슬쩍슬쩍 가리고, 시험 답도 일부러 틀린 것을 쓰기도 했다. 눈치 빠른 Y양은 자기 맘대로 잘 안 되는 내가 눈엣가시였을 터.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왔다. 책상의 3분의 2를 자기가 차지하게 금을 그어놓고, 조금만 넘어가면 팔을 꼬집었다. 그것도 모자라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내 허벅지를 꼬집어 항상 멍이 들게 했다.

허벅지에 든 멍만큼이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던 어느 날, 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대로 두면 날 계속 괴롭힐 테고, 그러자고 선생님께 말씀드리기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럴듯한 묘수를 찾아냈다. 있는 그대로의 일을 고스란히 일기에 적어내려 갔다.

선생님 책상에 일기장을 내려놓고 하루 종일 어찌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조바심이 바짝 말라갈 즈음, 선생님은 심각한 얼굴로 Y양과 나를 앞으로 불러내 사실 여부를 물으셨다. 무섭게 다그치는 선생님 앞에서 Y양은 사실대로 고백했다. Y양은 혼이 나고 벌을 섰다. 물론 매도 맞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보복이 두려워 떨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Y양의 끈질긴 괴롭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바람대로 일기 사건 이후에 Y양은 나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짝을 바꿔 주셨고, 그 이후 주의 깊게 우리를 살펴보셨다. 때문에 간간히 Y양은 삿대질만 해댔고, 나는 그럭저럭 무난한 날들을 이어갔다. 내가 쓴 방법이 찝찝하긴 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이 옳았는지는 확신할 순 없다. 조금 비겁했다는 생각은 들지만, 다시 돌아가도 여전히 똑같은 답안지를 찾아들고 떨고 있을 게 분명하다.

깊게 박힌 옹이를 시원하게 뽑아낸 적이 없어서일까. 이젠 웃으며 넘길 때도 되었건만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아리다. 크고 작은 교실 폭력 소식을 접하면, 조건반사처럼 Y양이 친구들 위에 군림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세월에 깎여 맷집이 커져도 때론 기억에 찔릴 수 있나 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친구들과 연락이 잦아진다. 언젠간 그녀도 자연스레 만날 날이 올 것이다. Y양을 만난다면 “너 그때 왜 그랬니?”라고 한번쯤 물어볼까. 날 괴롭히던 Y양의 예쁜 얼굴에 심통이 난 나도 참 속물스럽다.

심명옥 안산문인협회 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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