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오후, 햇살이 거실로 들어와 길게 드러눕는다. 기울기를 한껏 낮춘 햇살은 거실에서 자리를 많이 차지한다. 그 위에 바빴던 며칠간의 사연을 쭉 펼쳐 놓아도 넉넉하겠다. 작가 이상(李霜)의 방으로 들어온 보자기만한 햇살이 친구였듯, 무료한 내게도 넓은 햇살은 반가운 방문객이다.

햇살판을 영사막 삼아 부유하는 먼지를 바라보는 시간이 여유롭다. 총총거리는 시간을 잠시 접어두는 하루가 가볍다. 일상을 저울에 달면 무게가 얼마나 나갈까. 자고 먹고 일하고 놀고 쉬고, 끊임없이 반복하여 공기처럼 익숙해진 하루.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 덕분에 새삼 일상의 의미 찾기에 골똘해진다.

표면적으로 보면 영화에서 보여주는 일상은 단조롭기 그지없다. 월요일에서 시작하여 월요일로 끝나는 8일 동안엔 이렇다 할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주인공 패터슨은 인간 시계 칸트처럼 생활한다.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출근해 일을 하고, 퇴근을 해 부인 로라와 대화를 나누다, 반려견을 산책시키고, 단골 바에 들러 맥주를 마신다. 부인인 로라는 내내 컵케이크를 굽고, 흑색과 백색으로 서클과 패턴을 그려내는 일을 즐긴다. 영화 스토리로는 밋밋하다.

아다지오로 흐르는 일상이 시가 되고 음악이 되는 지점은 패터슨과 로라가 변주해 내는 하루하루 속에 들어있다. 패턴이 반복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벽하게 똑같은 날은 단 하루도 없다. 일어나는 시간부터 단골 바에서 겪게 되는 일까지 미세한 차이들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너무 소소해서 영화거리가 될까 싶은 8일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잔잔한 가운데서도 일상은 움직임이 느껴지고, 빛나기 시작한다.

우연히 성냥갑에서 확성기 모양으로 써 있는 글자를 보고, 시를 착상하고 완성해 나가는 패터슨의 눈길과 마음길이 인상적이다. 한 줄 시에 마음을 뺏긴 패터슨은 깊은 눈길로 주위를 관찰하고,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오감을 활짝 열고 사는 그의 하루는 물리적인 24시간보다 훨씬 두터워진다.

정적인 패터슨이 시를 쓰는 반면에 동적인 로라는 음악을 즐긴다. 조용조용 혼자만의 시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패터슨과 달리, 가수가 꿈이라며 기타를 사는 로라는 밝고 적극적이다. 시와 음악이 본디 하나인 것처럼, 정(靜)과 동(動)의 조합인 패터슨과 로라는 사랑스럽게 닮아 있다. 시를 사랑하지만 패터슨은 시인이 아닌 운전기사고, 가수가 꿈이라지만 로라의 노래는 어설프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엮어내는 일상은 그대로 시가 되고 음악이 된다. 그들의 하루를 지켜보며 내 일상도 출렁인다.

영화 속 주인공에게만 일상을 변주할 힘이 있는 건 아니다. 우리에게도 있다. 너무 익숙해서 자주 놓치는 일상은 모든 변화의 발화점이다. 자고 먹고 일하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세상과 인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가 누려야 할 의미 있는 시간이다.

물론 영화에서처럼 매일 의미를 캐낼 수는 없다. 살다 보면 무의미한 날이 있을 테고, 그저 건널목이 되는 날들도 숱하게 많을 게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하루가 있기에 내일이 있고 앞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겐 일상을 반짝이게 닦아야 할 책임이 있다, 누구에겐 시가 되고, 누구에겐 음악이 되는.

때로는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한다고 한다. 공허한 눈빛으로 물 위에 쓴 시라 자조하는 패터슨에게도 분명 다시 시는 꿈틀거렸다. 무료하게 놓쳐버린 하루 속에도 무수히 많은 신호들이 있겠다. 일상을 시로, 시를 일상으로 채워가는 일은 이제 우리 몫으로 넘겨졌다.

심명옥 안산문인협회 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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