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豹菴표암 姜世晃강세황 예술제’로 새 시대를 열자”는 글을 썼다. 그 글을 읽고 동조하는 의견들이 많았다. 하지만 반대하는 의견도 소수지만 있었다. 이에 한 번 더 보충 설명해 드리고자 한다.

첫째, ‘별망성 예술제’는 이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城성의 종류에는 산성, 읍성, 별망성 등등이 있는데, 모두 일반명사이다. 따라서 ‘산성 예술제’라는 이름은 있을 수 없다. ‘남한산성 예술제’라는 식으로 해야 고유명사가 된다. 또 ‘읍성 문화제’도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안산 읍성 문화제’라고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별망성 예술제’도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또 이런 의견을 준 분도 있다. 그 동네를 ‘별망’이라고 불러 왔다. 그 고유명사에 ‘城성’을 붙였으니 ‘별망성’은 고유명사가 아닌가 하는 의견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한 것이다. 초지진의 별망성이 생기면서, 그 마을이 ‘별망성 마을’로 불렸다. 그걸 편하게 부른 게 ‘별망’이다.

그 지역을 기록한 문헌들을 보면 모두가 ‘초지진’, ‘초지량영’으로 적었지 ‘별망성’이나 ‘별망’으로 적지 않았다. 이는 제3자가 객관적으로 그곳을 보면 고유명사는 ‘초지진’, ‘초지량영’이고 ‘별망성’과 ‘별망’은 일반명사라는 것을 말해준다. ‘별망성’은 ‘초지 별망성’이라 해야 고유명사가 된다. 예술제 이름도 ‘초지 별망성 예술제’라고 해야 고유명사가 된다.

둘째, ‘초지 별망성 예술제’와 ‘표암 강세황 예술제’ 중 어느 쪽이 안산을 대표하는 예술제 이름으로 알맞을까? 필자는 초지 별망성이 예술과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누가 그 관련성을 가르쳐 주면 고맙겠다.

표암 강세황 선생은 18세기 조선 예술계의 總帥총수이다. 표암은 본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생활이 어려워 처가인 안산으로 32세 때 내려왔다. 지금의 상록구 부곡동에 자리 잡았다. 표암은 청문당 주인인 처남 柳慶種유경종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표암은 ‘蓮城八景연성팔경’이라 하여 안산의 뛰어난 경치 여덟 곳을 시로 지어 읊었다. 거기에는 鷲巖취암에 솟는 붉은 해를 비롯하여, 聲浦洞성포동의 정월 雪景설경, 月陂洞월피동의 저녁 물결 등 안산의 여덟 가지 아름다운 절경이 담겨 있다. 그만큼 표암은 안산을 매우 사랑했다.

표암은 안산의 문화•예술 발전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끼쳤다. 안산이 자랑하는 단원 김홍도 선생은 스승 표암이 없었다면 없었다. 또 미술 평론가로서 표암은 단원에게만 ‘神筆신필’, ‘神品신품’, ‘入神입신’ 등 최상의 평가를 하였다.

표암을 만나러 崔北최북 등 수많은 문인, 화가들이 안산을 찾았다. 표암은 玄齋현재 沈師正심사정과 가까워서, 그에게 단원을 가르치게 하기도 했다. 또 표암은 문인이자 화가인 紫霞자하 申緯신위 등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표암을 중심으로 午川詩社오천시사가 만들어졌다. 또 이들을 중심으로 안산 15 學士학사 집단이 형성됐다. 또한 표암은 안산에 거주하던 여주 이씨들의 剡溪詩社섬계시사에도 참여했다. 그때 그런 문화•예술 모임들을 오늘에 되살리자는 것이 바로 안산이 예술제를 하는 의의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표암 강세황 예술제’라 해서 그 맥을 이어야 옳지 않은가. 해안 초소를 예술제 이름으로 삼는 건 부끄럽지 않은가.

18세기에 성호가 있어 안산이 조선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듯이 표암이 있어 안산이 조선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표암을 예술제의 이름으로 삼아서 기리는 것이 후손의 도리이다. 위대한 조상을 내팽개치고 돌덩이를 예술제 이름으로 모시는 안산의 문화•예술인들은 각성해야 한다.

김창진 초당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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