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빌려달라는 그녀의 전화는 좀 생뚱맞았다. 그녀와 나의 연결고리라고는 아동복 매장에서 손님과 주인으로의 만남뿐이다. 막역하여 어려운 일을 부탁하고 말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덜컥 돈을 보내 주고 말았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시동생의 절박한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시동생은 허구한 날 우리에게 돈을 융통해 달라고 했다. 말로는 꾼다지만 단 한 번도 갚은 적은 없다. 아파트 대출금 이자를 갚느라 반찬값 하나도 아껴야 할 상황인데, 시동생 때문에 가게부에 구멍이 여러 번 났다. 시동생은 당구장이나 액세서리 가게를 한다며 아버님의 연금을 날리기도 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크고 작은 도움은 건너가는 즉시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러면서도 답답해하는 건 가족뿐 시동생은 그다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시동생의 태도 때문에 지쳐 갈 무렵, 갑작스레 교통사고 소식이 날아들었다. 노란 은행잎이 하릴없이 곱기만 했던 가을날들,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시동생을 보러 오가며 수없이 되뇌었다. 한 번만이라도 깨어나 달라고, 미안하단 말은 꼭 듣고 가라고. 끝내 시동생은 말 한 마디 없이 저 세상으로 건너갔다. 노란빛 속으로 사라진 시동생은 내게 마음의 짐을 고스란히 남겨 두고 갔다.

마음의 짐은 시동생의 유품을 정리하며 점점 무거워져 갔다. 우수수 쏟아져 나왔던 ○○캐피탈의 독촉장은 시동생의 혹독했던 현실을 뒤늦게 대변해 주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고지서들을 펼칠 때마다 캐피탈 직원들이 외나무다리에 서 있는 시동생을 잔인하게 흔드는 모습이 떠올랐다. 원금에, 어느 사이 원금을 웃도는 이자가 더해진 고지서들. 물론 제3금융권이 시동생을 직접적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아니다. 시동생은 교통사고가 났고, 그 사고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다만 온통 끌탕만 하며 살다간 서른 남짓한 시동생의 짧은 생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거란 짐작에 제3금융권을 고운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떠난 사람은 말이 없는데, 남아 있는 사람은 오래도록 그 뒷그림자를 지우지 못하고 산다. 가끔 만취해 “녀석, 지금이라면 내가 저 하나 설 수 있게는 도와 줄 수 있을 텐데.”라고 푸념하는 남편의 소리를 듣는 마음이 아리다. 가늠되는 아쉬움이고, 나 또한 안고 있는 마음의 부채이다.

나날이 대출 광고들이 넘쳐난다. 채널을 돌릴 때마다 제3금융권 광고는 화려한 부나방처럼 유치하게 이목을 끈다. 가시 돋친 달콤한 날갯짓에 타들어갈 간절한 모습들이 보여 나는 광고를 대하는 마음이 불편하다. 광고 속에서 시동생과 그녀가 파닥거리며 마음을 콕콕 찌른다. 광고 너머 누군가의 아픈 이야기도 들려오는 것만 같다.

요즘 대출 광고들을 보면 처음 한두 달은 무이자라며 달콤한 덫 놓기를 서슴지 않는다. 원숭이 꽃신이 따로 없다. 오소리는 원숭이에게 처음에 공짜 꽃신을 주어 길들인 다음, 나중에는 필요하면 사게 만든다. 꽃신을 몰랐던 원숭이는 결국 거지가 되어 오소리의 갖은 심부름을 해 주는 신세로 전락한다. 무이자라는 미끼에 혹해 급한 불을 끄려고 제3금융권을 이용하다가는 큰코다친다. 사람은 잠을 자도 이자는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한다. 덥석 미끼를 문 물고기는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시동생뿐만 아니라, 멋모르고 발을 들인 그녀의 삶도 엉망이 되어간다. 석 달 후 갚는다던 돈은 몇 년째 깜깜 무소식이다. 그렇다고 그 날로 돌아간다면 난 그녀의 부탁을 단번에 거절했을까? 어려운 일이다.

심명옥 안산문인협회 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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