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림의 왕자 타잔. 나이에 따라 그를 기억하는 게 다를 거다. 누구는 텔레비전 흑백영화로, 누구는 1999년에 개봉한 다이나믹 애니메이션 「타잔」으로. 아마 지금 어린이들은 어린이 뮤지컬 「밀림의 왕자 타잔」을 떠올릴지 모른다.

이렇듯 다양한 매체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내가 인생의 책으로 《밀림의 왕자 타잔》(에드가 R. 버로우 저, 계몽사)을 이야기하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팬티 하나만 달랑 입은 채 밀림을 누비는 그의 줄타기를 보고 재미와 짜릿함은 느끼기 쉬우나 감동까지 가기는 멀기 때문이다.

나에게 《밀림의 왕자 타잔》은 슬픈 사랑 이야기다. 처음 읽은 연애 소설. 초등학교 때 유명 출판사의 명작 시리즈를 섭렵했는데 이 책이 있었다. 그 때는 9시가 되면 들려오는 “어린이 여러분,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라는 아나운서의 멘트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키스 장면만 나오면 텔레비전을 끄는 아버지 때문에 ‘사랑’을 잘 몰랐다. 게다가 그동안 읽은 책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아름다운 결말로 끝나서 마냥 흡족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그런데 《밀림의 왕자 타잔》은 불행한 결말로 끝난다. 사랑하는 제인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시로 간 타잔. 하지만 그녀에겐 약혼자가 있다. 자신의 존재가 부담만 된다고 생각한 그는 다시 밀림으로 향한다. 이제 막 떠나려는 기차... “사랑한다.”는 고백을 꺼내지 못하는 그,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그녀. 맥없이 사랑을 놓는 두 사람이 바보 같고, 세상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도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서러워 한참을 울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얕은 겨울 빛이 곧 사라지고, 나는 인생의 한 단계를 책 한 권으로 훌쩍 뛰어넘었다.

그 이후 인생의 책을 묻는 질문이 오면 살짝 고민스러웠다. 한 소녀의 마음을 울린 이별의 순간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후루룩 읽을 두 서너 페이지를 마냥 붙잡고 있었다는 걸 짐작이나 할까. 이왕이면 수준 있는 책을 읽는 지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얄팍한 허영심도 한 몫 했다. 그래서 한동안 《어린 왕자》나 《데미안》 같은 권장도서목록에 오른 책들을 이야기하기도 했고.

그런데 내가 놓친 게 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어떤 책을 열 명이 읽었다면 열 명의 느낌과 생각이 다르단다. 내가 《밀림의 왕자 타잔》에서 모험이나 정의를 가져오지 않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건져 올렸듯, 저마다 마음을 울리고 생각을 움직이는 뭔가를 가져간다는 말이다.

인생의 책을 묻는 질문은 줄거리가 궁금한 게 아니라 그 답 안에 담긴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얘기였다. 더불어 그 기억을 통해 자신을 만나고, 위로와 성찰의 길로 한 걸음 나아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설령 인생의 책이 명랑 만화나 달달한 하이틴 문고였다고 해도 부끄러울 일이 아니다. 아예 그런 책이 없는 사람에 비해 즐겁고 의미 있는 기억을 한 자락 더 갖고 있다는 의미니까. 수시 면접이나 취업을 준비할 때 혹은 누군가 물어올 때 정말 자신의 마음을 건드린 책을 찾고, 그 책으로 변화된 경험을 솔직하게 꺼내보라는 응원을 보낸다. 당신 인생의 책은 무엇인가.

황영주 안산문인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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