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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계절에서는 추억이 채색을 한다
반월신문 | 승인 2018.10.10 14:29

훅, 택배상자를 받아들자마자 향긋한 내음이 코를 덮친다. 상자를 열어보니, 나란히 들어앉아 있는 자두의 빛깔이 곱다. 껍질은 어찌나 탱탱해 보이던지 땅에 던지면 그대로 튀어오를 것 같다. 마음이 급하다.

제일 맛있어 보이는 것으로 하나 골라 쓱쓱 문질러 한입 베어문다. 자두 물이 고이기도 전에 눈이 저절로 슴벅거린다. 올해도 목사님은 내 입맛을 고려해 살짝 덜 익은 자두를 잘 골라 보내 주셨다. 오래 전에 전당포에 맡겨 놓았던 귀금속을 찾아온 듯 반가운 맛이다.

한동안 잊었던 자두를 다시 먹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부터이다. 항암으로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나를 위해 지인이 자두 한 박스를 보내 주었다. 좋아하면서도 어릴 때 먹던 맛을 만날 수 없어 사먹지 않은 지 오래였는데, 자두를 보는 순간 돌다리 건너던 시절의 추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한달음에 고향집 울타리 앞으로 달려갔다. 흐린 시야 앞에도 여전히 싱싱한 자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옆집 자두가 너무 탐이 났던 아이는 여름 방학 내내 자두나무 밑으로 달려가곤 했다. 미리 점찍어둔 자두 몇 알을 따오며 옆집 들창이 벌컥 열리지나 않는지 마음을 졸였다. 그러면서도 부엌으로 숨어들어 먹던 그 자두맛은 어찌나 기막혔던지. 새콤달콤한 맛과 와삭바삭한 식감에 쫄깃한 긴장감까지 얹힌 옆집 자두의 맛은 세월이 흘러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고향을 떠나 옆집 자두 맛을 기대하고 사 보지만 매번 실망만 했다. 잘 익어 너무 달기만 한 자두에서는 그 옛날 맛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푸른 기 도는 자두를 사면 단맛은 없고 시고 쓴 맛만 났다. 단맛과 신맛이 어우러지고, 과질은 아삭거려 목으로 넘어갈 때 상큼하면서도 꽉 찬 느낌을 주는 자두는 없는 것인지. 원하는 맛은 물론 추억과 감정까지 되살려 음식을 만들어 준다는 소설 속 <가모가와 식당>이라도 찾아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현실 속에서 안 되니, 아예 자두를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딱 필요한 시기에 그리운 맛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지인이 보내 준 자두를 조심스레 열어 맛을 보았다. 놀랍게도 그렇게 찾아 헤매던 맛이 입안에 고여 들었다. 밥 대신 자두 몇 알로 버텨냈다. 자두가 없었다면 투병의 시간들이 더 혹독했을 것이다. 자두 덕분에 터널 같은 시간 속에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갈 힘을 얻었다. 그 순간도 벌써 추억이 되었다.

추억에 추억을 얹으니, 자두는 새콤하면서도 달달한 맛에 따뜻한 맛까지 얻는다. 지인이 보내 준 자두를 다 먹도록 항암은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입맛을 되찾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미 겨울이었다. 고민 끝에 박스 안에 있던 연락처로 전화를 드렸더니, 냉장고에 남아 있던 자두를 편지와 함께 보내 주셨다. 목사님도 당신 자신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 지으며 목회활동을 하고 있으니, 내게 힘내라는 따뜻한 마음이 담긴 편지였다. 비록 겉은 쭈글쭈글하고 단맛만 나는 자두였지만, 따뜻한 맛을 새로 품었다.

지금까지 목사님께 자두를 주문해 먹고 있는 것은 새로 얻은 맛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옛날 옆집 아저씨 아주머니도 따뜻한 마음으로 눈감아 주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와 생각하면 매일 달라지는 자두나무를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을 텐데, 자식이 없던 두 분은 나의 서리쯤은 웃으며 넘기지 않았을까.

맛의 계절에서는 추억이 채색을 한다. 자두 하나에 올올이 풀려나오는 이야기가 있어, 내가 먹는 자두의 맛은 오래 전과는 다르다. 어느 요리사는 추억의 반은 맛이라더니, 내게는 맛의 반은 추억이다. 단맛, 신맛에 웃는 맛, 아련한 맛 등등 감성까지 얹어 음미하니 맛이 맑고도 깊다. 자두 한 알 물고 나니, 햇살 속에 서서 나비물을 꽃밭에 뿌리며 맑게 웃는 얼굴 하나 떠오른다.

심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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