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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음에, 이다음에심명옥 수필
반월신문 | 승인 2018.10.04 15:44

한바탕 폭풍이 몰아쳤다 잠잠해졌다. 아침상 차리며 도시락 싸는 와중에 교복까지 다리느라 얼마나 종종거렸던지, 서늘한 기운이 무색하게 땀이 난다. 휘모리장단처럼 아이가 등교하고 난 뒤, 널브러진 식탁 위를 쳐다보며 잠시 숨을 돌린다.

고3 작은아이의 심리상태는 요즘 들어 자주 요동친다. 수능 날짜가 다가오는 만큼 까칠해진 탓이다. 우스갯소리로 떠돌아다니는 고3 사용 설명서의 “잔소리 하지 마세요. 늦게 자도 뭐라 하지 마세요.”를 착실히 실천 중인데도, 아이는 불만이 생기면 참을 줄 모른다. 학원 앞 정시 대기는 물론 밥도 원하는 시간에 딱딱 챙겨 주어야 한다. 본인이 흘려버리는 시간도 많은데, 내 몫이라 생각되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탄식을 터트린다. “아!”라든가 “휴!”라든가. 지능적으로 짧게 뱉어내는 말에 감정이 엄청 실린다.

작은아이의 모습 위로 내 열아홉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지내놓고 보면 대학이 별것도 아닌데, 그 땐 왜 전부로 보였는지. 아버지는 나를 대학에 보내 주지 않겠다고 하셨다. 논이라도 팔아 대학에 보내 주겠다는 친구의 아버지가 크게 보이는 것에 비해 반대하는 내 아버지는 작아 보였다. 아버지 뒤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엄마도 답답해 보였다. 나를 위해 싸워주길 바랐지만 엄마는 확답 없이 무조건 공부만 하라고 했다.

대학에 가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공부에 매달렸다. 성적을 올리려고 나는 두꺼운 책 끼고 다니던 겉멋을 걷어치우고, 짝사랑의 연정도 접었다. 그러면서 속이 완전히 뒤집혔던 것 같다. 밥을 아예 못 넘긴 날이 많았다. 예민해지니, 공부하다가 조금만 삐끗하면 난 화살을 다 엄마에게로 돌렸다. 빠듯한 살림에 옷을 다릴 일 별로 없던 우리 집엔 그 흔한 전기다리미가 없었다. 교복을 다리려면 숯불다리미를 써야 했는데, 한여름에 어쩌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날이 있으면 그걸 핑계로 엄마에게 볼멘소리를 쏟아냈다.

일일이 열거해 보니 참 낯 뜨거운 일들인데, 그렇게 행동하면서도 원망만 컸다. 그럼에도 엄마는 내게 화를 낸 적이 별로 없다. 밥 못 먹는 나를 위해 콩물을 따로 준비해 주었고, 일 년 내내 숯불을 꺼트리지 않으려고 엄청 애를 썼다. 짜증 부리느라 밥을 굶고 간 날이면 어김없이 쥐포와 빵을 들고 늦은 밤 교실 앞을 지켰다. 바쁜 농사일 짬짬이 별스런 딸 하나 챙기느라 버거우면서도 엄마가 내려놓은 푸념이라곤 하나밖에 없다. “이다음에 너 같은 딸 하나 키워 봐.”

한동안 잊고 살았던 팔딱팔딱한 기억들이 작은아이를 통해 다시 펼쳐지면서 엄마 말을 실감하는 날들이다. 살면서 엄마 말이 맞는 건 진즉에 봐 왔지만 이렇게 까탈스러운 모습까지 들춰지며 그 말을 되새길 줄이야. 한 계단 오르면 보이는 만큼만 엄마 말을 따라 예까지 왔다.

“내리 사랑은 있으나 치사랑은 없다.”는 옛말이 있다. 아무리 인간 대 인간으로 엄마를 다시 읽기 시작해도 부족한 사랑을 느낀다. 받은 사랑을 되돌려 드리기보다 자식에게 사랑을 쏟는 데 매달린다. 때로 연민의 감정을 붙잡고 죄송했다고 하면 엄마는 다 그런 법이라며 웃고 만다. 사랑은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나 보다.

어느 순간, 나도 엄마의 모습을 그대로 복습하고 있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윗사람의 길을 내며 따라가고 있다. 예전에 미처 몰랐던 엄마의 마음을 나중에 읽은 것처럼 작은아이도 지금은 내 마음을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얄궂은 사랑의 순환고리지만 서두를 필요 없다. 시간이 지나면 작은아이도 나처럼 자연스레 마음을 알 날 있을 것이다.

오늘도 뭐가 맘에 안 드는지 작은아이는 문을 쾅 닫고 학교로 갔다. 다부진 뒷모습에 아른거리는 열아홉 살 내 그림자를 보며 씩 웃고 말 한마디 속으로 삼킨다. ‘너도 이다음에 자식 키워 보면 다 알 걸.

심명옥 안산문인협회 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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