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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와 대부도는 내노래의 영혼'독도강치 대부포도 가수 서가인
최제영 기자 | 승인 2018.10.04 15:38
가수 서가인씨가 독도에서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강치야' 신곡 앨범을 내고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서씨는 최근 독도와 울릉도를 방문해 공연하는 등 신곡 알리기에 여념이 없다.

가수 서가인씨는 뚜렷한 역사관과 지역사랑을 갖춘 지성인이었다. 독도를 사랑하고 자신이 살고있는 안산 대부도를 흠모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가수일거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참으로 부끄러웠다. 아버지는 외과의사였고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랐다. 아버지는 당시 가수 등 연예인을 낮춰 말하는 '딴따라'가 되는 딸을 인정할수 없었다. 나름 형편이 풍족했을 그가 이종환 명동 쉘부르를 통해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건 타고난 '끼'라고 밖에는 설명할수 없다고 했다. 수많은 방송을 통해 노래를 불렀지만 아직 지역 가수로 알려진 것이 안타깝다고 자신을 다독이고 있었다. 이 같은 한계를 벗어나고 싶다고도 했다. 그는 이제부터라도 제대로된 가수로 탄생하고 싶다는 희망을 안고 있었다. 다부진 몸매에 환한 미소를 간직한 그가 독도의 아픔을 노래한 '강치야'를 내놓으면서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지난달 28일 울릉도에서 개최한 '세계문화체육예술축제' 무대에서 부른 '강치야' 노래가 뜻이 깊었다고 회고했다. 지금은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강치 노래를 부른 그의 신념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그녀를 만나 가수 인생의 얘기를 차분히 들어봤다.

Q언제부터 노래를 시작했나.

-1987년부터 대중앞에 서기 시작했다. 지금은 작고한 이종환 선생님과 인연을 맺으면서 노래를 시작한 셈이다. 통기타의 산실이라 할수 있는 명동 쉘부르에서 이종환 선생님으로 부터 직접 오디션을 통해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한달에 한번씩 가수 지망생을 대상으로 심사를 하는데 어찌보면 당시 가수 등용문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우순실이 부른 '잃어버린 우산'과 한경애의 '파도였나요'를 불렀다. 단 한번에 합격을 했는데 어떤 가수 지망생은 수십번 도전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고 난 뒤에 매일 그곳에 출연해 노래를 불렀고 하루 1500원 정도의 차비를 받았다. 한 1년 정도를 그렇게 활동했다. 지금생각하면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볼수 있다.

Q공식적인 가수 활동에 대해 궁금하다.

-1988년 1월 장충체육관에서 진행한 KBS 전국노래자랑 신년 특집에 출연을 하면서 부터라고 보면된다. 당시 인기상을 받았는데, 지금의 인기상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색적으로 웃기거나 하면 주는 상이 아니라 노래실력을 기준으로 평가해 인기상을 주던 시절이었다. 1996년에 결혼하면서 KBS 주부가요열창에 나간 적이 있다. 두차례 출연해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불렀는데 대상을 수상했다. 지금은 그 프로그램이 없어졌지만 말이다. 그리고 2011년 11월로 기억되는데 KBS 가요무대에 출연해 포크송을 불렀다. 기타를 치면서 장은아의 '고위한 선물'을 열창했다. 가요무대 성격과는 좀 차이가 있었지만 그 노래를 불러 관객들로 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다.

인터뷰에 앞서 자신이 가수로서 지금까지 살아온 사연을 털어놓고 있다.

Q가수로서 어려움은 없었나.

-이루말할수 없는 힘든 일이 많았다. 아버지가 외과 의사였는데 내가 가수되는걸 극구 반대했다. 당시만 해도 연예인 하면 '딴따라'라고 비하하던 시절이었다. 노래를 하고 싶은데 아버지가 반대하니 얼마나 힘들었겠나. 더군다나 나는 무남독녀 외동딸이다. 그래서 한때 가수생활을 접기도 했다. 유치원 교사도 했고 피아노 선생도 한때 해봤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2007년 서울에서 살다가 안산으로 이사왔는데 어머니 마져 치매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됐다. 공기좋고 한적하다는 생각에 안산에 왔다. 어머니는 안산시립요양병원에서 오랜동안 투병생활을 하셨다. 동산교회에서 성가대 활동도 했는데 끝까지 노래를 접을수는 없었다.

Q대부도 가수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 대부도는 천혜의 관광자원을 갖고 있다. 2005년에 첫 앨범을 냈는데, 타이틀 곡이 '사랑하면서'라는 노래다. 당시 첫 공연을 위해 영흥도를 다녀온 적이 있다. '영흥도 포도 축제'로 기억되는데 시화방조제를 건너면서 수많은 것을 느끼게 됐다. 그중 하나가 대부도의 '낙조'였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느낌을 받았다. 서울 주변 수도권에 이 같은 바다와 섬 낙조를 볼수 있는 곳이 과연 몇군데나 있겠나. 너무나 감격스러워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2015년에 내놓은 기념앨범이 '내사랑 대부도'라는 노래다. 가슴을 울리는 대부도의 모든것을 담고 싶었다. 그런 악상이 문뜩 떠올라 만든 노래다. 노랫말 한구절을 소개하고 싶다. '해솔길 걸으며 근심모두 버려요. 희망과 사랑안고서 함께 걸어요'. 해풍을 맞고 자란 대부포도 얼마나 당도가 높은가. 세계에서 몇번째 안에 든다는 대부도 낙조풍경을 전국에 알리고 싶었다. 그런 안산을 알리기 위해 몇년전 '홍보대사'를 자청했지만 무위로 끝났다.

Q이번에 또한번 큰 일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산 대부도 이상으로 사랑하고 보호하고 싶은 곳이 바로 우리나라 땅 '독도'다. 수년전 우연히 독도 '강치'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는 얘기를 들었다. 강영만 영화감독으로 부터 배경음악 조연출을 맡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시나리오를 먼서 읽어보면서 '강치'의 슬픈 사연을 알게됐다. 평소 독도에 대한 관심이 무척 많았기에 유심히 시나리오를 보게됐다. 지금은 멸종된 강치는 어찌보면 독도를 상징하는 신선한 일이다. 그러나 강치 영화는 완성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투자자가 흥행성 등을 살펴봤는지, 중도에 포기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사)대한민국 독도사랑 세계연대 주최로 세계문화체육예술축제 초대가수로 초청을 받고 노래를 불렀다. 다름아닌 '강취야'라는 타이틀 곡이다. 이달(9월)에 3집 앨범을 낸 것이다. 그러면서 독도 홍보대사 위촉도 받았다. 독도사랑 밴드를 통해 노력한 결과물이다. 일본이 기회 있을때마다 되새기는 독도 소유권 얘기는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치가 떨린다.

Q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나.

-지역 가수의 한계를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다. 독도 사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독도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생각이다. 기회가 된다면 이미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강치의 캐릭터를 제작해 모든 국민들에게 전파되는 날이 오길 바란다. 안산시도 대부도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려 노력하고 있지만 피부로 와 닿지는 않는다. 대부도는 섬마을 선생님의 노래 배경이 된 섬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런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더라. 대부도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알리고 싶은 까닦이기도 하다.

Q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은.

-가수라는 직업으로 살아온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가끔씩 공허함을 느끼며 살고 있다. 실력으로 인정받는 가수의 길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게 사실이다. 그동안 어려움이 있었지만 극복하면서 살아왔다. 남편과 가족 등의 힘이 위로가 된 경우가 많다. 이번 독도방문과 울릉도 공연을 하면서 다시한번 다짐을 했다. '독도는 우리나라 땅'이고 '반드시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됐다. '강치야'가 국민들 가슴속에 파고들어 외롭게 죽어간 강치의 생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다시한번 호소하지만 강치의 캐릭터가 나와 우리들 가슴에 늘 함께 하는 날이 빨리 오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최제영 기자  cjy1010@ians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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