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만블라선원 주지
 

진리란 흔들리는 물 속에 떠 있는 달과 같다. 서옹스님의 글이다.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며 가을에는 밝은 달이 있으니 그것이 곧 진리가 아니겠는가. 아무리 혼탁한 물이 침범하고 흐려놓아도 내 마음만 올곶게 가면 세상이 믿어준다.

가을은 완숙의 계절이요, 인연을 찾아 제 자리로 돌아가 훌훌 털어버리고 비우는 때다. 여름날의 젖고 눅눅해진 옷은 말리고 찌든 때는 지워야 한다. 무엇이든 지우고 비우며 털어내는 것 만큼 좋은 것이 또 있을까.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외로운 건 용기가 없어서라고 한다. 삶에는 우리가 넘어서야 할 문턱들이 있다. 아침을 넘어서야 점심이 오고, 저녁이 지나서야 다음 날을 기대할 수 있다. 가을 문턱을 넘어서야 겨울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문턱은 삶의 고비에 해당한다. 고비를 넘어선 행복의 경지는 잘 보이지 않게 마련이다. 보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의 경계는 우리가 넘어서야 할 고지다. 꽃을 피우기 위해선 진흙이 필요하지 않은가. 고난이 없으면 인생의 지혜도 얻을 수 없다.

현대인들은 하나라도 더 갖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간다. 악한 사람들은 선한 자들의 재산을 탐내어 사기를 치고 빼앗기도 한다. 정말 못된 심보다. 각박한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선 타인을 해쳐도 된다는 이상한 논리가 넘쳐난다.

모름지기 욕심이 지나치면 삶의 고통 또한 커지는 법이다. 어쩌면 채움을 갈망하는 현대인들은 끝없는 고통의 쳇바퀴에서 헤어나지 못할 운명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현대인들은 자꾸 무언가를 버려야 살아갈 수 있는데, 내 물건 하나라도 버리는데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

소승은 근래 좋은 뜻에서 시작한 일이 어처구니없게 악의적인 반대급부로 돌아와서 봉변을 당한 일이 있다. 욕심 많은 사람의 심중은 모를 일이다. 구봉도에 절 터를 잡은 지도 어언 5년이 지났지만 스님인 저에게 무엇이 그리 탐났던지 지역의 텃세와 욕심을 가진 주민들의 음해와 협박은 그칠 날이 없었다.

소승을 곤경에 빠뜨려 쫒아내기 위한 일념 하나로 몇몇 주민들이 모여 공영방송사에 허위 사실을 제보한 것이다. 해당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재판 결과, 공정성이 결여된 것으로 깨끗하게 결론이 났고 방송은 삭제되었다.

이제껏 저의 반대편에 선 주민들이 고소한 건들은 모두 혐의없음을 받은 반면, 소승이 이들을 고소한 건은 전부 승소판결을 받았는데, 이에 분함을 참지 못한 주민들이 모여 작당하고 기회를 잡아 전체 주민들을 선동하여 허위 증언을 꾸며서 벌인 일이었다. 일체의 정황을 고려하지 않고 편파 보도한 방송PD는 언론중재위원회 위원들의 말마따나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

소승에게 사사건건 앙심을 품한 주민들은 안산 지역신문 김모 기자와 짜고 여전히 시비를 걸어오고 있다. 이 자는 상가재개발 이권의 욕심이 있을뿐 소승의 절이 있는 ‘세종상가’의 소유자도 아니며, 또한 자격이 없음에도 소승과 적대관계에 있는 상인들과 한 무리가 되어 무법으로 자신을 상가회장이라고 말하고 다니고 있다.

그리고 기존 단체카톡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몰래 따로 단톡방을 만들어 혼돈을 주었고 그 단톡방에서 끊임없이 전(前)회장인 소승을 비방하고 국회의원과 시의원들과 친분이 있다는양 과시했으며 "시와 국회간 세종상가 재건축건을 보고한다"는 글을 올린 적도 했다.

이 국회의원과 시의원은 과연 누구일까. 김 기자라는 자의 글을 보면 세종상가 단톡방에서 실제로 재건축 논의 따위를 하였던 걸까. 허울과 탐욕에 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궁(窮)해야 저절로 비워지고 성숙해지는 법이다. 삶은 허허실실(虛虛實實)이다. 비워야만 다시 채워진다. 마음이 버겁고 힘들어서 무너질 것 같으면 다 내려놓어야 한다. 욕심을 내고 생각이 많으면 일을 그릇치고 만다.

무릇 이 가을밤, 김정한의 소설 산거족(山居族)에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사람답게 살아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한다든가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의 갈 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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