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문인협회 재무국장.

그 땐 왜 그랬을까. 지금은 일부러 찾아다니며 먹곤 하는데, 유년의 기억 속에선 보리밥을 먹는 건 늘 힘든 일이었다. 보리밥은 툭하면 입안에서 겉 돌기 마련이었고, 겨우 씹어 넘기면 목에서 걸려 뻑뻑거렸다. 마치 왕겨가 넘어가는 느낌이어서 배가 고파도 쉬이 숟가락을 들 수 없었다. 그런데도 생일날이나 추석, 설 명절을 빼곤 시커먼 보리밥이 올라오기 일쑤여서 밥상을 마주 하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의 밥그릇은 내겐 신천지였다. 엄마가 육체노동을 하는 가장을 위해 따로 차린 밥상엔 우리들의 두리반에 놓여 있는 밥과는 달리 늘 쌀밥이 고봉으로 올라 있었다. 하얀 눈처럼 고운 쌀밥이 소복이 담긴 밥그릇을 쳐다보는 일은 내겐 멈출 수 없는 유혹이었다. 엄마의 눈치에도 아랑곳없이 난 아버지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어떤 핑계를 대서든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분명 하얀 쌀밥이 탐이 났거나 먹고 싶어 쓴 꾀였거나 둘 중 하나였겠지만, 아버지는 그런 나를 항상 모른 척 눈감아 주었다. 밥을 다 드시라는 엄마의 지청구에도 아버지는 내가 딱 먹을 만큼의 밥이 남으면 수저를 내려놓았다. 배가 부르다고 밥그릇을 한쪽으로 밀어놓으며 아버지는 슬쩍 곁눈으로 나를 바라보곤 하셨다. 식사 시간마다 반복된 작은 눈치전쟁의 승리자는 매번 나였다. 할 수 없이 엄마는 아버지 밥그릇에 점점 더 높은 이팝나무 꽃을 쌓아 올렸다.

밥상은 평소에 무섭게 보이던 아버지의 뭉근한 사랑이 건너오는 지점이다. 매운 꾸지람과 숨 막히는 규율을 앞세운 아버지는 늘 저 건너 서 있는 분이었다. 집 밖에서 자전거 타고 오는 아버지를 보게 되면 무슨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어린 머리는 복잡해지곤 했다. 어색한 순간이 싫어 차라리 밖에선 마주치지 말았으면 싶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가 한쪽으로 밀쳐놓은 밥그릇에서 한 뼘은 가까워졌다.

참으로 오랜만에 아버지의 밥그릇을 다시 받아들었다. 권사인 엄마의 소원대로 교회식 장례를 치르느라 올리지 못한 밥 한 그릇을 남매들끼리 아버지의 새 주소지 용인공원 정남1남 34에 올렸다. 잠든 아버지를 깨워 밥을 드리고 난 후, 오빠가

“아버지 밥은 명옥이가 먹어.”

하는 순간 우린 서로 눈을 맞추며 활짝 웃었다. 내겐 아버지에게로 가는 특별한 기억이, 다른 남매들에겐 얄밉게 보였을 수도 있었을 텐데, 부재의 추억 속에서 가벼워진다.

가을 햇살이 더없이 맑다. 그곳의 햇살, 계절을 지나는 미묘한 바람의 결까지 모조리 기억하라는 듯 흐린 기운이 말끔히 걷혔다. 저마다 풀어놓는 이야기로 아버지가 누운 자리 앞 돗자리에 깔린 밥상에선 추억이 몽글몽글 피어난다. 다시 한 번 아버지의 모든 생이 사랑으로 정제되어 저마다의 가슴 속에 별로 박힌다. 제 몫의 그리움을 안고 살겠지만 가끔 서로에게 기대 나누며 위로받을 수 있겠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처럼 내 아버지의 사랑 표현법도 투박했다. 무논에서 논둑으로 개어 올린 흙처럼 거칠고 제멋대로였다. 하여, 매마저도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야 했다. 자식을 기르면서도 마흔이 넘어서야 아버지의 진짜배기 사랑을 읽어냈다. 긴 시간 지고 왔을 가장의 무거운 짐에 대한 깊은 연민을 느낀 다음 올려다본 아버지는 누구보다 사랑 많은 분이셨다, 오로지 가족이라는 외길만 보고 달려온.

너울너울 추억이 온다. 난 그분의 처음과 끝의 그 너머를 모른다. 애써 그분이 어디서 왔는지 안다 해도,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움이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른다. 재가 되어 하늘하늘 날아오르던 아버지의 옷을 좇아 무조건 하늘로 향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게 됨으로써 마음으로 훨훨 날아드는 날갯짓을 맥 놓고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본격적인 그리움은 이제부터라는 듯 아버지는 자꾸 나를 끌어당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오래도록 나를 쳐다보던 아버지의 마지막 눈빛을 올올이 풀어가며 살아낼 삶이 내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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