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 경기도 지부 안산시 지회 문해진 회장

지난 8일 취임식을 마친 문해진 광복회 경기도 지부 안산시 지회장이 '안산 광복회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안산에 사는 후손들에게 뜻깊은 유산을 남겨주고 싶다는 심정을 밝히고 있다.

광복회 경기도 지부 안산시 지회가 자리잡은 곳은 구 안산시 상록구청 자리였다. 조립식 건물 1층인데, 언뜻 보기에도 초라한 건물이었다. 안산시 여러 산하단체가 모여있는 이곳은 추울때는 더 춥고 더울때는 더 추울듯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다행히 에어컨 바람이 40도를 육박하는 체온을 좀 가라앉혀 주고 있었다. 지난 8일 취임한 문해진 회장은 깡마른 체구였지만 애국지사 후손답게 당당하고 위엄있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앞으로 광복회가 이뤄내야 할 계획을 내놓을 때는 더욱더 힘이 있어 보였다. 인터뷰를 주선한 문학평론가 한정규 작가도 그를 높이 평가했다. 올곧게 살아온 후손은 그래서 그런지 자부심과 희망이 넘쳐 보였다. 오늘이 (8월15일)이 광복절이기에 '수요일에 만난 사람' 은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Q 광복회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나는 애국지사 후손이다. 아버지가 애국지사다. 아버지 문남일 옹은 전남 보성 장흥지역에서 농민운동을 해오신 분이다. 일제 탄압이 극에 달할 무렵에 농민신문을 창간하셨다. 농민신문을 비밀리에 제작해서 지역 사회에 배포했다. 언론의 중요성을 그래서 알게 됐다. 당시는 인쇄소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1000여매의 신문을 만들어 농민들에게 일제의 악행을 널리 알렸다. 지금 생각해도 아버지의 항일운동은 생명을 담보로한 위대한 행동이었다. 12년 전, 그러니까 지난 2006년도에 아버지가 정부로 부터 애국지사 건국훈장 서훈을 받았다. 이듬해인 2007년에 광복회 안산지회가 설립되면서 나도 동참하게 됐다.

Q 아버지가 항일운동 이후 고생도 많이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혹독한 댓가를 받고 살았다. 일제 때 순사에게 붙잡혀 목포교도소에서 1년간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어머님의 고생도 오랜 기간 계속되었다. 호남 지역사회에서 아버지의 공로는 크게 인정 받았지만 가정의 어려움은 한동안 계속됐다. 어머님께서는 남다른 재주를 가졌고 지금 생각하면 기능 재부의 달인이었다. 한복 바느질 솜씨가 대단했는데, 동네 사람들의 한복 지어주는 일을 많이 하셨다. 뿐만 아니라 부락마다 잔치가 벌어지면 손수 달려가 몸을 아끼지 않고 봉사하셨다. 모두가 아버지를 위한 것도 있었지만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그런 부모를 만난 자신이 자랑스럽다. 가끔 가슴이 찡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부모님 생각을 할 때면 눈물이 날 때가 많다.

Q 부모님 영향을 많이 받았을텐데, 어떻게 살았나.

-지난 1963년에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전남도청과 광주시청 등에서 15년 가량을 근무했다. 보람도 있었고 아쉬운 부분도 있다. 시민과 국민에 봉사하는 공직자로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다.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일은 광복을 위해 몸을 던진 아버지의 충정과 다를게 없다고 생각했다. 이후 공직생활을 그만두고 안산과 인연을 맺게 됐다. 1981년에 안산으로 이사를 오면서 안산사람이 됐다. 안산에서 안 해본게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반월공단에서 공장 매점과 식당, 슈퍼 등을 운영하면서 서민들의 애증을 보았다. 물론 내 자신도 고생을 했지만 일정 부분 보람도 있었다. 큰 돈을 벌어 힘든 이웃을 돌보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그런 부분이 아쉽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남을 위해 살고 싶다.

Q 안산 광복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달라.

-지금 대략 60 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부분 회원들이 고령자가 많다 보니 어려운 점도 많다. 여타 보훈 단체에 비해 회원수가 훨씬 적다. 6.25참전 단체나 상이군경회, 월남참전 용사 단체들에 비해 연세가 많은 분들이 특히 많다. 그러기 때문에 예산이라든지 재정 부분에 대해 어려움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할 일은 많은데 걱정이 태산이다. 그러나 회원간의 친목도모 등은 여타 단체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 의미 있는 사업이 무척이나 많다. 그동안 경기도에서 하던 3.1절 행사나 8.15 광복절 행사를 안산에서 개최하고 있다. 안산문화예술의 전당 등에서 진행하는데 참 의미가 크다고 본다.

조례개정으로 3.1독립공원으로 변경

기념탑 넘어 독립기념관 조성이 최종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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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평균 연령 85세, 회비갹출 어려워..운영에 애로

반월신문 기념사업 동참 희망..여건 어렵지만 최선 다할터

Q 그 밖에 자랑 할만한게 뭐가 있나.

-연중 행사로 연 2회로 진행되는 태극기 무료 보급행사를 빼놓을 수 없다. 아쉬운 점은 집집마다 태극기 다는 가정이 점점 줄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부 하건데 태극기 게시는 나라를 사랑하는 행동의 표시이다. 점점 태극기를 멀리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태극기 보급은 안산시의 예산지원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시민들의 호응도는 무척 높은 편이다. 주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전국의 항일 유적지 순례방문 또한 자랑 할만 하다. 뿐만 아니라 보훈처의 지원으로 회원들의 손자 손녀들을 대상으로 국외 항일 유적지 방문도 의미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애국에 대해 주기적인 교육도 안산 광복회의 자랑거리라 할수있다.

Q 앞으로 안산광복회가 추진할 사항은 무엇인가.

-할 일이 참 많이 있지만 몇 가지만은 분명히 말하고 싶다. 우선 가칭 '안산 광복회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할 계획을 갖고 있다. 안산에는 다른 도시에 비해 크고작은 공원들이 많다. 그래서 안산 3.1 독립공원을 만들고 싶은게 큰 꿈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크게 어려울 것도 없다. 시의회에서 조례를 개정해서 기존 공원의 이름만 바꾸면 되는 일이다. 또한 광복 기념탑을 만들고 그 틀에서 독립 기념관을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다. 그 과정에서 각종 수익사업을 창출하고 산교육장을 만드는 것이다. 후손들에게 그런 부분을 물려주고 싶은 것이다. 간곡히 부탁 하건데 반월신문에서 이 같은 사업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하고 싶다. 저의 솔직한 심정이다.

Q 내부적으로 어려운 문제는 없나.

-아까도 언급했듯이 여타 보훈단체에 비해 회원수가 적고 따라서 예산도 부족한게 현실이다. 사무실 운영 면에서도 그렇다. 최소한 2명 정도는 내근자가 있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보다시피 겨우 한 명이 근무하는 정도다. 고령자가 많다 보니 회비를 갹출할 상황도 아니니 얼마나 어렵겠나. 그렇다고 수익사업도 현재는 없다. 회원들의 평균 나이가 85세다. 안산시와 안산시 의회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다.

Q 광복회 사무실에 걸려있는 사진들을 보니 뿌듯한 생각이 든다.

-그렇다. 김구 선생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사진으로 볼 때마다 든든함을 갖는다. 이 모두가 역사가 아니겠는가. 이분들이 계셨기에 오늘날 우리가 독립된 나라에서 편하게 살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옆에 있는 본부장이나 한정규 문학평론가께서 곁에 있어 늘 편안하게 광복회를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의사결정을 하는데 있어서도 의견을 함께 나누고 서로 존중하니 행복한 단체라고 자부할수 있다. 마음이 통하니 광복회 단체도 크게 발전하리라 굳게 믿고 있다. 이분들과 앞으로도 훌륭한 광복회를 이끌고 싶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반드시 '안산 광복회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후손들에게 의미있는 족적을 꼭 남기고 싶다. 안산의 각계각층에서 관심을 갖고 응원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특히 반월신문에서도 광복회가 계획하는 이번 사업에 힘이 되어 주고 함께 하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안산에서 반월신문은 역사적으로나 발행 부수 측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언론이다. 아버지가 농민신문을 창간에 항일투쟁에 나섰던 만큼 언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알고 있기에 드리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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