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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신현미 | 승인 2018.06.27 10:28

여름방학을 맞아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 딸의 방을, 이런저런 바쁜 일들로 다음날에야 들여다보았다. 책상과 전자건반 위에서 춤추고 있는 악보들, 사방에 흐트러져 있는 옷가지들…. 평소에도 비슷한 풍경이지만 조금 더 심각하다. 기말시험과 발표회를 치르느라 연일 편하게 잠 한숨 제대로 못 자더니 여행에 임박하여 급하게 짐을 챙겨 떠난 모양이다.

작사와 작곡을 전공하는 딸은 글 쓰는 엄마보다 더 바쁘다. 한 달 전쯤에는 밤샘작업을 하고나서 식사도 거른 채 아르바이트를 갔다가 그곳에서 쓰러지는 바람에 응급실로 실려 간 일이 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병원 단골이긴 했지만 점차 건강해져 한시름 놓고 있었는데 생각지 못한 응급호출에 많이 놀랐다. 그런데도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이라 불평 한마디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다.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던 아이가 고1 겨울방학에 갑자기 음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반대했다. 딸은 고집을 부렸다. 남편과 나 또한 절대 안 된다고 막았다. 한참을 실랑이 했다. 그러나 음악을 해야만 행복하겠다는 딸아이에게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리고 지금의 안정을 찾기까지 쉽지 않은 길을 극복하여 왔다. 딸아이의 피아노 건반을 만지작거리다보니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다 2002년 11월의 어느 날에 머문다.

바쁜 아침 계속해서 울려대는 전화를 받고 보니 친정아버지다. “오후 서너 시경 너희 집에 갈 거니까 집에 꼭 있어라.” 거리도 멀거니와 딸은 출가외인이라 여겨 평소 딸네 집에 거의 오지 않던 칠순의 아버지가 먼저 오겠다고 연락을 주시니 반가우면서도 무슨 일일까 궁금했다. 아버지는 혼자 오시지 않았다. 시커먼 피아노를, 운반하는 분들과 함께 실어와 승강기도 없는 빌라 3층까지 올리고 계셨다. 놀라서 쳐다보는 나에게 “그러고 섰지 말고 얼른 피아노 놀 자리 좀 만들어라” 하신다. 외손녀가 피아노학원에 다닌다는 소식에 사왔다며 열심히 연습 시켜 음악가를 만들라고 너스레도 떠신다. “너도 시간 날 때 연습하고 그래라. 애 배울 때 같이 하면 일거양득이지.” 하마터면 눈물을 보일 뻔했다.

음악에 재능을 보이던 막내딸이 그토록 배우고 싶다고 조르던 피아노를 경제적 무능함으로 포기하게 했던 일과 그로 인해 반항, 원망, 다그침 등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만들었던 일들이 가슴 깊이 남아 있으셨나보다. 그러다가 다섯 살 어린 외손녀의 소식을 듣고 당장 피아노를 사서 달려오신 것이다. 딸에게 못해준 것을 손녀에게 선물함으로서 조금이라도 위안을 삼고 싶으셨으리라. 다행히 다섯 살 어린 딸은 피아노를 좋아해 열심이었다. 그래서 내심 피아니스트 탄생을 기대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흥미를 잃더니 진도가 늘지 않아 체르니도 겨우 끝냈다. 또, 숫기가 없어 사람들 앞에 서면 쭈뼛거리는 통에 담력이라도 키워줄 요량으로 합창단에도 가입시켰다. 하지만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고 실력도 늘지 않아 결국 음악에는 재능이 없는 아이로 단정지어버렸다.

그렇게 초등학교 이후 음악과는 담을 쌓았던 딸애가 고1 겨울방학 때 작곡을 하겠다고 하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재능이 있어도 힘든 세상에 겁도 없이 뒤늦게 덤비는 모습이 한참 철없어보였다. 하지만 음악을 해야만 행복하겠다는 데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잘한 결정이다. 어린 외손녀에게 선물한 외할아버지의 피아노가 한동안 무의미했었는데 결국 음악가의 길로 이끄는 축복의 마중물이었던 것이다.

부모는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뭐든 해주고 싶다. 그러니 형편이 안 되어 자식이 원하는 것을 해주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쓰리고 아플까. 자식일 때는 몰랐다. 부모가 되고 보니 조금씩 헤아려진다. 헉헉거리는 여든여섯 노고의 아버지는 아직까지도 지천명을 넘긴 막내딸을 만나면 모아둔 쌈짓돈이라도 쥐어주고 싶어 하신다.

글을 쓰는 중에 여행간 딸로부터 선물을 뭐로 사갈까 묻는 톡이 왔다. 저렴한 현지 거리표 액세서리를 사다달라고 부탁하고 보니, 갑자기 바쁘다는 핑계로 잘 찾아뵙지 못했던 노쇠한 아버지를 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다.

 

신현미  cjy1010@ians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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