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숙(인문학공간 '벗에게가는길' 대표)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목가시’에서 음악을 창조하는 목동들이 있어 시와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풍요로운 땅을 지명했습니다. 그리스 중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초원 ‘아르카디아’입니다. 일종의 ‘유토피아’이지요. 일반적으로 유토피아는 상상의 세계지만 아르카디아는 현존하는 곳입니다. 이 유토피아인 아르카디아를 배경으로 17세기 화가 니콜라스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은 두 점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한 점은 영국의 차트워스 궁전에 있고 오늘, 우리가 볼 것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아르카디아의 목자들>입니다.

화면을 보니 잘 짜인 구조에 명확한 윤곽선으로 안정적인 구도입니다. 색조의 대비도 분명하군요. 전통적 고전주의 기법입니다. 그럼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볼까요?

화면 중심에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있습니다. 남자들은 목동인 듯 하군요. 모두 나뭇잎으로 엮은 관을 쓰고 지팡이를 들고 있습니다. 한 명은 황토색, 한 명은 파란 색, 한 명은 붉은 천을 두르고 있네요. 여인은 밝은 황금색 옷자락을 늘어뜨렸습니다. 이 네 사람은 모두 커다란 무덤 주위에 모여 있습니다. 파란 색 옷을 입은 남자가 비석의 글자를 손가락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붉은 색 옷을 입은 남자는 손가락으로 글자를 가리키며 여인을 쳐다보고 있네요. 마치 “이게 무슨 뜻일까요?” 하듯 말입니다. 놀라운 건 우아하고도 사색적으로 서 있는 여인의 얼굴에 드리운 우수입니다. 여인은 빨간 옷을 입은 목동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린 채 통찰력 있는 표정으로 무덤을 내려 보고 있습니다.

비석에는 라틴어로 이렇게 써 있습니다.

“Et in Arcadia ego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나’는 ‘죽음’을 뜻합니다. 풍요로운 낙원, 이상향인 아르카디아에도 ‘죽음’은 있다는 말입니다. 푸생은 이 영원한 낙원에 대한 환상을 깨는 동시에 낙원이 주는 쾌락도 죽음 앞에선 덧없으며 인간은 누구나 유한하고 그것은 공평하다는 진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외향적이고 격렬한 시대입니다. 구호가 일상어가 된 듯 높고 날카로운 소리들이 쩌렁쩌렁 벽에 부딪칩니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포스터가 펄럭입니다. 선거라는 운동장에 제각각의 생각과 미래들이 보호 장구나 배려 없이 던져지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슬픔을 존중해서 거리를 갖고 자신의 아픔을 자제하는 미덕을 바라기엔 너무 소란한 시대를 살고 있나 봅니다. 삶 곁에는 항상 죽음이 있으며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데 ‘세월호 납골당’은 저마다의 유토피아적 구호 속에서 우리 곁을 떠나 길을 잃어 버렸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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